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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작 | SEPTEMBER 5 2025
제3회 밴쿠버교육신문&주밴쿠버총영사관 청소년 글짓기대회 3rd
대상 김 세린 (Seaquam Secindary School Gr.11)
나를 울린 하드보드지
나는 현재 캐나다에서 유학 중인 고등 이처럼 아주 사소한 단서까지도 하나 틀에서 벗어나 큰 의미의 가족을 고려한
학생이다. 하나 적어 내려갔다. 그 하드보드지는, 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에 만족할 수 있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캐나다 모자이크 그들에게 단순한 종이가 아닌 ‘희망’이 을지도 모른다. 이산가족, 이혼 가정, 부
사회에 지내면서 한국인이라는 좁은 생 었다. 모의 버림의 받은 아이들, 갑자기 부모를
각에서 벗어나 전세계 민족들이 하나라 그 수많은 사연 중에서도, 내 마음을 잃은 아이들,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받는
는 넓은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내 가 가장 깊이 흔든 이야기는 ‘허씨 남매’였 아이들 그들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존
족이라는 작은 틀에서 사람이라는 큰 다. 전쟁 통 속에 흩어진 남매는, 부모님 재한다. 나는 사회가 평범한 사람들에
틀로 바뀌었다. 그리고 남북 분단으로 의 고심 끝에 각각 고아원과 양녀로 보 기준을 맞추기 보다는 소외 되어 있는
인해 가족이 지구상에 살지만 만날 수 내졌고, 그 이후로 서로의 소식을 잃었 층에 관심을 가지고 개선해 나가야한다
없는 비극을 알게 되었다. 다. 세월이 흘러도 동생의 얼굴조차 기 고 생각한다. 그 작은 노력들이 사회를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억나지 않았지만, 오빠는 끝내 포기하지 조금이나마 아름다운 사회, 다 함께 행
1983년 여름, KBS에서는 특별한 생방 않았다. 그가 마지막 희망으로 선택한 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
송을 시작했다. 6•25 전쟁으로 헤어진 것이 바로 이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을 것이다.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기 위해, 무 기적처럼, 오빠는 생방송 화상통화를 통 현재 우리는 함께 있다는 익숙함에, 가
려 138일간 이어진 방송이었다. 대학교 해 동생을 마주했다. 화면을 보자마자 장 소중한 이들을 당연하게 여긴 건 아
입학 지원서에 한 줄 커리어를 만들기 위 동생은 “오빠다…”라고 나직이 말했다. 니었을까? 그들의 존재만으로 하루가
해 참가한 ‘통일 골든벨’ 준비를 하며 사진 한 장 없이 20년을 살아온 세월이 ‘꿈처럼 행복한 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북한 관련 자료를 찾아보던 중, 알고리 었다. 그럼에도 단번에 알아본다는 건 잊지 말아야 한다. 함께 있는 시간이 줄
즘이 추천한 오래된 영상 하나가 내 시 얼마나 절절한 그리움이었을까. 이튿날, 어들어도, 마음만은 더 단단히 연결되는
선을 붙잡았다. 동생은 제주에서 대전으로 날아가 오빠 관계.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다시 살아
그것은 40여 년 전의 생방송 기록이었 를 만났고, 그 장면은 또다시 생중계되 갈 용기를 주는 사람들.
고, 나는 무심코 재생 버튼을 눌렀다가 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전쟁 이제 나는 그저 도덕 교과서 속 문장이
다섯 편이나 연달아 시청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내 핏줄이 아무도 없어 너무 외로웠 아닌, 삶 속에서 진심으로 ‘가족의 소중
영상 속에서 사람들은 종이 한 장 없이, 는데, 오빠를 만나 하루하루가 꿈만 같 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좀 더 늘어
오직 희미한 기억 하나만을 붙잡고 가 다.” 그 말은, 내 마음에도 깊은 울림을 가길 바란다.
족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모두 전쟁 당 남겼다. 그리고 소망한다.
시 어린아이였고, 성인이 되기 전 흩어졌 1950년 발생한 6.25 전쟁으로 지금까 누구든 너무 늦기 전에,
다.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 ‘가 지 남한과 북한은 가깝지만 갈 수 없는 자신의 곁에 있는 가족을 바라보며
족’이라는 단어 하나로, 그들은 다시 그 곳이다. 가족이 있어도 만날 수 없는 곳. ‘허씨 남매’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다시
기억을 되살려 보려 애썼다. 글을 읽거나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한번 배운다.
쓸 줄 모르는 이들을 위해, 대학생 자원 들지만 현실이다. 가족이란, 피를 나눈 사람 그 이상이
봉사자들이 커다란 하드보드지에 그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인 가족과의 만남 다. 그 존재의 소중함을 온전히 느낄 수
의 이야기를 대신 써주었다. 실현이 불가능하다. 이제 세월이 흘러 이 있기를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왼쪽 뺨에 점 산가족의 대부분은 고령의 나이다. 그리 그리고 가족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
이 있었고, 어릴 적 할머니 손을 잡고 양 고 그 세월동안 남과 북이 여전히 대립 뜻한 가족이 되어 줄 수 있는 성숙한 사
말을 팔러 다녔다’ 상태인 것이 안타깝다. 가족이라는 작은 람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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