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8일 ThursdayContact Us

고통과 원리 / 오석중

2026-10-08 12:42:02

어깨가 아프다. 한동안 아프지 않아 이대로 굳는 건지, 나아진 건지 궁금했는데 다시 저리고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 전 가정의가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하는 나에게 ‘70이 넘으면 그렇다고, 팔을 어깨 이상 올리지 말라’고 해서 놀랐는데 바로 그 오른쪽 어깨가 다시 저리고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통증은 나에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지만 알려주는 역할인 통증이 좋을 리 없고 그것으로 인해 설사 목숨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아프지만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통증의 입장으로서는 몸의 이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 속해서 알리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병이 낫지 않아 아픔을 느끼는 통증의 주인은 이제 그만 알려주었으면 하고 통증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다가 통증은 단순한 알리는 역할에서 벗어나 몸에서 괴로움으로 받아드리지 않을 수 없고 병과 함께 공공의 적으로 인식되어 간다. 이것을 원리라고 하기도 하고 시스템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받는, 받아드리는 쪽의 입장이나 결정에 따라서 다른 효과를 가지게 한다.
원리는 무엇을 작동시키느냐에 따라 부분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는다. 커다란 틀에서 부분은 부분이라는 국소적인 이해관계에 한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으므로 나는 부분으로서 나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점이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지만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나의 고통이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더욱 힘들게 한다. 받아드리기 싫은 일을 받아드려야 하는 것은 내가 살아 있고, 나의 기가 살아 있는 한 나의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내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일이 나의 몸의 통증으로 인한 불편함에서 연유한다면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또는 안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에 대한 선입견을 지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단순한 나의 행동도 잘못된 판단을 받는 일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정상적이라는 말은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고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기준은 신체적인 표준을 말하기보다 우선 대다수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기 바라지만 다른 사람과 같기를 바란다. 이것은 때때로 모순이지 만 우리의 생각이나 소망은 때로 아전인수 격인 소망을 갖는다. 잔디의 뿌리를 먹고 자라는 곤충의 애벌레를 먹으려는 까마귀를 싫어하는 것은 나의 잔디가 까마귀에 의해서 훼손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잔디는 굼벵이라는 애벌레가 벌써 훼손시켰지만 최종적으로 잔디의 모습을 바꾸는 것이 까마귀인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증오의 대상에 우선 까마귀를 먼저 올리게 된다. 알고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이해하면서도 감정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 일이 흔하다. 나는 굼벵이에 의해 이미 훼손돼 뿌리 없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잔디를 보고 최종적으로 잔디를 뒤집어 놓는 까마귀에 더 분노한다. 나는 통증을 먼저 느끼고 그것이 병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더 가까이에 있는 아픔을 싫어한다. 나는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선량한 시민이지만 알고 보면 모두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2026.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