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단체 나섰다 … KCWN 주최 토론행사
KCWN(Korean Community Workers Network, 회장 스텔라 김) 주최 ‘Learning from the Past, Moving Forward to Future’ 포럼이 지난 7일 오후 6시 써리 길포드 레크리에이션 센터 크래프트 룸1에서 개최했다.
이 날 행사는 최근 랭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명 욱일기 사건에 대한 학교 학부모와 한인들이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스텔라 김 회장은 “이번 포럼은 랭리 학교 교실에 욱일기 게양 사건에 대해 캐나다 사회에 한국 근대사를 좀더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함이다”라고 취지를 밝혔다. 이어 “랭리교육청, 랭리시 하원의원, 시의원, 학교 관계자 등 40명에게 초청장을 보냈지만 4명에게서만 참석하지 못한다는 이메일을 받았을 뿐 다른 분들에게는 답변 조차 받지 못했고 참석자 또한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 날 행사에는 오유순 무궁화재단 이사장 및 랭리 학교 학부모, 학생 등 한인들이 참석했다.
심현섭 역사 칼럼리스트의 ‘욱일기를 내려라’라는 제목으로 한일 전반에 대한 역사와 욱일기에 대한 정의 등 강의가 있었다. 참석자들은 한일관계에 촛점을 맞추기보다는 유럽의 역사 속 만행의 상징인 나치기 같이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만행의 상징이라는 점을 강조해야한다고 토론했다.
< 연설기고 >
욱일기를 내려라 / 글 심현섭 역사칼럼리스트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날 때까지 일본의 잔혹한 식민통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악한 고통을 한국인에게 주었습니다.
삼일독립만세운동, 강제징용, 강제 징병, 종군위안부, 독립운동 탄압, 조선어 금지, 창씨개명, 토지 및 자원 강탈, 신사참배 강요. 등등 이루다 열거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조선어 사용을 금하고, 성씨를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였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조선어를 사용하다가 적발되면 교실 한 쪽에서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서 있어야 했습니다.
일제는 자신들의 문화를 우월하다고 여기고 조선의 전통문화를 억압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자신들의 종교를 믿도록 강제한 종교탄압이었습니다.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었는데 여기에 참배할 것을 강제하고 이에 응하지 않는 기독교 신자나 목사들을 가두고 고문했습니다.
전쟁이 확대되는 동안 노동자로 강제 징용된 이들은 사할린 섬 등 일본의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거나 군속으로 차출되어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와 남양 군도 지역의 군사 기지 건설이나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이중 상당수가 임금 없이 과중한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희생되었고, 사할린의 징용된 조선인들은 냉전의 시작으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취직을 시켜준다는 거짓말로 속여서 탄광이나 군수물품 생산 공장에서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노예생활을 하며 죽어 갔습니다. 그때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수만 70만 명을 넘었습니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지금도 그때 못 받은 임금을 돌려 달라고 소송을 내고 대법원에서 승소를 해도 해당 기업이나 정부에서는 다 끝난 일이라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한편 전투력 약화를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징병을 실시하여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하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강제로 제국군대에 끌려가서 수많은 전장에서 이유도 모르는 채 죽어갔습니다.
종군위안부는 일본군이 영내에 성노예로 여성들을 감금하고 성착취를 한 역사상 전대미문의 야만적인 행위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집단적 성행위 장소인 이른바 군대 위안소를 제도화하고, 식민지 및 점령지 출신의 여성들을 전선으로 수송하여 성노예 역할을 강요했습니다. 한국, 중국 등 주로 식민지 여성들이 희생되었는데 지금도 한국에는 생존자들이 생생한 증언을 하고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수많은 증언과 증인들을 무시하고, 강제로 동원한 것이 아닌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관련국들에게 용서와 이해를 구하고 있는데, 일본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침략하고 중국대륙으로 전쟁을 확대해 간 것을 지금은 교과서에서 침략이 아닌 ‘진출進出’이라는 말로 호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최근 랭리 월넛 그로브 세컨더리 학교(Walnut Glove Secondary School)에서 교실에 욱일기(Rising Sun Flag)를 내걸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욱일기를 내걸어서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신 선생님이나, 이것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 학생과 학부모들의 생각이 너무나 판이하여 과거 역사인식에 엄청난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연합함대의 함선들이 하와이 진주만에 기만적인 공습을 가해 미태평양 함대에 치명적인 손실을 끼치고,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평화 공세를 펴며 미국을 기만하고 은밀하게 하와이로 접근해 온 모든 일본 군함에 이 문제의 욱일기가 펄럭이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욱일기는 일본 국기가 아니라 육군이나 해군에서 사용하던 일본 제국의 군기입니다.
욱일기는 1889년 일본 제국 해군 함대의 군기로 정해졌는데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표상이었습니다. 욱일기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상징입니다.
독일은 일찍이 주변국들의 반발로 하켄크로이츠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시켰고
전후 ‘반 나치 법안’을 통해 하켄크로이츠의 자국 내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일본은 점령국 미국의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다가 자위대에서 슬그머니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욱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본이 한국 및 주변국에 가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전쟁범죄를 상기시키는 깃발입니다.
현재 한국 국내에서는 절대로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욱일기가 일본인들에게는 과거 군국주의시대의 영광을 회상하는 계기가 되겠지만, 피해 당사국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상징물입니다.
욱일기를 교실에 내건 것이 역사교육적인 목적이었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산업화하고 그 힘을 이용해서 제국주의적 침략을 주변국에 감행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알려주기 위함인가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자국의 젊은이들은 물론 다른 나라 젊은이들까지를 무모하게 수없이 죽게 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인가요?
그것이 피해 당사국 사람들에게는 과거 고통을 상기시키게 만드는 표지라는 것을 전연 생각하지 못한 실책이었던가요?
유럽인들이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를 볼 때 느끼는 감정과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욱일기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은 같습니다. 한국인에게 욱일기는 전쟁범죄자들이 쓰던 깃발로 보일 뿐입니다. 해적들은 과거 까만 바탕에 해골과 뼈다귀를 그린 깃발을 돛대 위에 걸었습니다. 그 깃발을 보면 잔인했던 해적들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직도 한국은 일본과의 청산되지 않은 불행한 과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일본과 기꺼이 친구가 되어 공생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거의 잘못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욱일기를 교육을 위해 교실에 걸었다는 것은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줄 우려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도요타 자동차를 타고 스시를 맛있게 먹습니다. 일본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과거에 저질은 제국주의적 침략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욱일기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괴테를 읽고 베토벤을 즐겨 듣습니다. 독일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독일이 과거에 저질은 만행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켄크로이츠는 독일의 만행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싫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