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조 슈프라흐 짜라수트라” / 정효봉

2026-05-06 12:05:57

“알조 슈프라흐 짜라수트라(Also sprach Zarathustra), 독일어판으로 있나요?”
먼지 쌓인 헌책방의 공기를 가르며 들려온 그 말은 내게마치 낯선 나라의 주문처럼 들렸다. 나는 그저 멍하니 책방 주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주인은 대견하다는 듯 웃으며 서점 구석구석을 한참이나 뒤적였다. 마침내 서점 주인의 손에 낡은 독일어책 한 권이 들려 나왔다. 친구는 그것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히 가슴에 꼭 안았다. 나중에야 그 책이 니체의 저서 『Also sprach Zarathustra』의 독일어 원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우리가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고작 석 달 남짓 되었을 때라는 점이다. 이제 겨우 알파벳을 떼고 기초 문법을 더듬거리던 시절, 그 친구는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니, 이왕이면 니체의 원전으로 읽어보고 싶어.”라며 무모하지만, 찬란한도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까까머리 고등학교 1학년이 칸트나 니체를 입에 담는 것조차 낯설었던 시절, 그 헌책방에서 마주한 친구의 모습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 친구에게 느꼈던 묘한 열등감과 동경은 나를 스스로 채찍질하게 했고, 다시 그 헌책방으로 발걸음을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사실 그 친구는 평소 눈에 띄게 요란하거나 앞서는 아이가 아니었다. 늘 차분하고 조용했지만, 그 내면에는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당시 학교 간부로 활동하며 이런저런 학교 일을 수행하던 나에게 그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다. 내가 어떤 일의 장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특유의 차분함으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영리한아이디어들을 내놓곤 했다. 그의 조언은 늘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꿰뚫었다. 요란한 말들로 넘치던 교실에서 그는 소리 없이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친구는 전학이라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꽤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그는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시골의 연로하신 부모님을 떠나 서울 누님 댁에서 고학하고 있다는 소문만 어렴풋이 들릴뿐이었다. 그렇게 소중했던 나의 조력자에 대한 기억은 마음속 창고 깊숙한 곳으로 밀려나고, 그는 내 삶의 한 시절과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그 이후, 나는 내 삶에 충실하며 한국에서 30대를 치열한 경쟁 속에 보냈고, 40대에 이르러 캐나다 밴쿠버에 정착했다. 낯선 땅에서 사업을 일구는 이민자의 삶은 숨 돌릴 틈 없는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바쁘고 힘든 순간마다 내 손에는 언제나 책이 들려 있었다. “독서란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초인의 정신에 다가가는길”이라던 그의 무언의 가르침이 뇌리에 박혀, 나는 고독속에서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일 이어지는 독서는 단순한 습관이 아닌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소리 없이 내 곁을 지켜주던 친구와 나를 잇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켠 뉴스 화면에 낯익은 이름과 얼굴이 등장했다. 나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국가의 중차대한 현안을 논하며 날카로운 지성과 당당한 태도로 서 있는 한 정치인. 40여 년 전, 헌책방에서 니체 원전을 찾던 그 소년의 눈빛이 거기 있었다.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차분한 목소리와 흔들림 없는 눈빛. 그는 여전히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내면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거목이 되어 있었다.
요즘 나는 가끔 창밖의 밴쿠버 풍경을 보며 40여 년 전 그 시절을 떠올린다. 만약 그가 전학을 가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는 아직도 그 낡은 책을 서가에 간직하고 있을까. 멀리서 나마 친구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건넨다. “친구야, 자네의 멋진 모습이 참으로 자랑스럽네. 자네는 어떤 일이든 잘 해내리라 믿네. 그 옛날 우리가 동경했던 짜라 수트라의 ‘초인’처럼,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당당히 걸어가 주길 바라네.”
먼지 냄새가 나던 헌책방, 빛바랜 책들, 그리고 한 권의 독일어책을 소중히 안고 서 있던 그 소년에게. “언젠가 시간이 허락하는 날, 지친 어깨를 잠시 내려놓고 마주 앉아 소주 한잔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네. 그날이 오면 내가 먼저 자네의 잔을 가득 채우며 이렇게 인사를 건네고 싶네.”

“알조 슈프라흐 짜라수트라! 오랜만이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