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교민회장 정은숙은 회장 직위를 이용하여 장차 교민회를 팔아먹으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다. 정 회장은 낡아빠진 현재의 교민회관을 팔고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버나비나 코퀴틀람에 새 건물을 짓자고 하면서 벌써부터 모금운동을 하고 다닌다. 모은 돈이 몇 만 불 되는 데 그 돈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쓰이는 지 아무도 모른다. 만약 교민회관을 팔게 되면 새 건물을 다 지을 때 까지 교민회는 어디서 모임을 가질 것인가? 이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내어놓지 않고 있다. 이것은 아예 교민회를 없애려는 정은숙의 음모이다. 회관을 매각하면 돈이 한 이백만불은 될 터인데 이것을 근본도 모르는 정은숙에게 맡기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다. ‘먹튀’를 하면 누가 책임 질 것인가?’
한인상가 밀집지역에 이런 전단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글 쓴 작자는 소위 밴사모, 즉 밴쿠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면서 개인 이름은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아. 그 자식 정말 치사하네. 이름처럼 웃기네. 이거 이주일이 짓이지 누구겠어? 웨스트밴쿠버 3천만달러짜리 대저택을 소개해준 인연으로 정 회장이 그 자식을 부회장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은혜도 모르고 배신을 해? 정정당당하게 해야지. 무슨 국회의원선거야, 대통령 선거야. 웬 삐라는 뿌리고 난리야.
선배는 아예 이주일이 선거에서 불리하니까 정은숙을 깎아내려 덕을 보려 한다고 단정 지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펄쩍 뛰었다. 아니. 강형도 알다시피 사내새끼가 되어가지고 비겁하게 상대방 후보 욕하는 그런 놈이요? 그깐 교민회장 자리가 뭐라고. 정 회장 잘 했어, 2년 동안. 그런데 연임은 좀 그렇잖소? 난 정 회장을 위해서 대항마가 된 거요. 페어플레이 해서 지면 깨끗이 승복하는 게 내 인생관이요. 어떤 놈들이 내가 삐라를 돌렸다는데 인간 이주일 그런 놈 아니요. 일단 한 번 믿어 보시라고. 오히려 정은숙이 쪽에서 그런 짓을 하고 내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역공작을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어.
사실 나로서는 정회장과 마찬가지로 이 부회장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학 졸업 후 밴쿠버로 건너와 청소부, 잡역부, 잡화점 점원, 식당종업원 등 온갖 험한 일을 다 하다가 부동산 중개인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고는 사는 게 좀 나아져서 교민회 봉사도 하고 있다는 뭐 그런 정도의 지식밖에 없었다. 골격이 크고 얼굴은 우락부락해서 첫인상이 좀 무서워 보였지만 천성이 솔직하고 매사 행동이 직선적이어서 뒷구멍으로 음모나 꾸미는 그런 위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런 전단을 한인밀집지역에 뿌려댄 건가. 그런 생각에 내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설여졌다. 전단의 내용이 근거가 있다고 인정하면 정 회장이 섭섭해 할 것이고, 아니라면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이 주일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돌리는 듯해서 회원들에게 내 의견을 쉽사리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삐라 제2호가 또 한인상가 밀집지역에 뿌려졌다. 역시 밴사모 명의였다.
‘정은숙은 교민회 돈을 제 돈 인양 흥청망청 쓰고 다닌다. 전 재무이사가 이를 만류하다 정은숙에게 미운 털이 박혀 쫓겨났다. 그래서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는 강성규를 새로운 재무이사로 들여앉히고 제 마음대로 교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준 교민회 기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쓰고 다닌다.’
교민회관 건물을 팔아 그 돈을 착복할지 모른다는 내용의 삐라 제1호는 현재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정 회장도 나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제2호에서 내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정 회장의 공금횡령을 도와주기 위해 교민회에 들어온 공범이라는 것이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내 기분이 문제가 아니었다. 삐라를 읽어 본 사람들 중 나를 아는 사람이면 설마?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모조리 다 똑같은 놈들이야’ 하고 나를 매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내에게 알려지면서 크게 확대되었다. 여보. 당장 그만둬요. 당신 뭣 때문에 당신 돈으로 차량 기름 값 내고, 점심 사먹어 가면서 그런 진흙탕 속에 빠져 들어요? 일해주고 욕먹고. 당신 한국에서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고위간부까지 지낸 사람이잖아요. 왜 그런데 발들이여 이름을 더럽혀요. 그만 나와요. 당장.
사실 여자 회장 밑에서 재무이사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아내는 탐탁해 하지 않았다. 아내나 나나 한국에서 꽤 오래 직장생활을 해 봤기 때문에 여자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 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아내는 대학 졸업 후 무역회사 경리부에 한 10여년 근무하면서 과장까지 승진했는데 퇴사 2년 전 부임한 부장이 여성이었다. 40대 초반 정도였는데 업무에 신경 쓰기보다는 옷차림과 외모에 꽤 공을 들이는 편이었다. 그러나 젊음은 따라갈 수 없는 법. 미모의 아내는 패셔너블한 옷차림에 항상 밝고 명랑한 반면 살이 찌고 평범한 외모를 가진 부장은 항상 어둡고 찌푸린 얼굴이었다. 기안서류에 글자 하나 틀려도 아내를 불러 야단을 쳤고, 매일 옷을 갈아입고 오면 회사원의 옷차림이 너무 야단스럽다느니 고상하지 못하다느니, 심지어는 립스틱 색깔이 쥐 잡아먹은 것 같이 진한 피 색깔이라고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아내는 회사 주거래은행인 한성은행 국제영업부의 외환업무 담당 대리였던 나와 업무관계로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서로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8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예식장에서 자기회사 부장이라고 소개했는데 나를 보고 웃는 모습이 제사상에 돼지머리를 보는 듯해서 순간적으로 피식 웃었더니 그 후로 아내에 대한 박해는 더 심해져서 첫째 아이를 가지자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같은 여자이면서도 임신한 직원을 못마땅해 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 부장은 결혼 9년차인데도 아이가 없다고 했다.
내 경우는 좀 달랐다. 신입행원 시절, 첫 근무지였던 한성은행 퇴계로 지점 예금계로 발령, 배치 받았는데 담당 대리가 여자였다. 이름은 오연숙. 경기도 소읍출신인데 서울에서 여자 상업학교를 나왔다. 문제는 나보다 한 살 위의 노처녀였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제대하고 처음 시작하는 직장생활이니 어려움이 많으실 거예요. 모르는 것 있으면 다 물어보세요. 내가 실무는 꽤 밝은 편이니까요. 그렇게 접근하는 그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도움도 많이 받았다. 잘 모르는 업무가 있으면 정확하고 상세하게 마치 수험생이 과외지도를 받는 듯 잘 가르쳐 주었다. 덕택에 업무는 빨리 익혔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야릇하다는 것을 그때는 느낄 수 없었다. 예금계 대리인 그녀는 나를 포함해 관리하는 창구직원이 여섯 명이었는데 내가 온 후로는 자주 회식자리를 만들었다. 1차는 삽결살에 소주, 2차는 노래방, 3차는 디스코텍이 거의 정해진 회식의 정석이었다.
그녀와 사귄다는 이야기가 돈다는 것을 한성은행 동기 기준범으로부터 들었을 때, 아하 직장에서는 처신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녀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각이 달랐다. 회식자리에서는 꼭 내 옆에 앉고, 노래방에서는 조용히 있다가 내가 노래를 부르면 다른 마이크를 잡고 내 옆에 민망스럽게 바싹 다가와서 함께 노래 불렀다. 디스코텍에서 빠른 춤곡이 블루스로 바뀌면 으레 그녀는 자기 것인 양 내 손을 잡았다. 그게 나는 싫었다. 여자는 조신하고 얌전해야지. 어디든 나서서 설쳐대는 것은 딱 질색이다. 너 마누라 얻을 때 많이 살펴라. 평생 활동적인 어머니의 그늘에서 살아온 아버지의 그런 충고가 아니더라도 나는 남자를 리드하는 여자는 싫었다. 여자는 ‘보호본능’을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배우자 관이었다.
은행 홍보모델을 하던 문영옥이 내가 근무하는 곳에 신입사원으로 예금 계에 배치될 때 오연숙은 바짝 긴장하는 눈치였다. 시원스레 큰 키에 꿈을 꾸는 듯한 커다란 눈동자,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라디오 성우처럼 깨끗하고 상쾌한 음성, 그런데 말수는 적고 절대 여직원들의 수다잔치에 끼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하는 편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지점의 모든 총각사원들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였다. 오연숙의 질투는 극에 달했고, 내가 문성옥과 함께 있으며 웃거나 이야기를 나누면 일 안하고 무슨 잡담이야. 여기가 당신네 놀이터인줄 알아? 하면서 앙칼을 부렸다.
정은숙 회장과 함께 일을 할 때 여자와 일할 때의 그런 미묘한 감정을 걱정했지만 그녀는 내가 하는 일은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로 총영사관에서 주최하는 단체장회의에 참석하거나, 자선단체 바자회, 교민자녀 장학금 모금의 밤, 연방정부나 주정부 의원 출마자들의 펀드레이징 행사 등에 참석하는 일 이외에는 교민회 운영을 모두 내게 맡겼다. 부회장이 있었지만 중요한 일은 주로 나와 상의했다. 이주일이 회장출마를 결심하게 된 것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정은숙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