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 수기 양영승의 ‘태극기가 나 영승이를 알아보는가?’
세번째 이야기
군대 입대 … 자동차 기술 교육
젊은 시절 한국이 모든 분야에서 어려울 때에 군대에 입대하여 618 주특기를 받고 (진해) 수송학교에서 자동차기술교육을 받았다. 그 시절 소위계급장을 단 육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교관이 “혹자는 군대를 인생에 잠깐 쉬어가는 코너라고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제 부터 이 나라에 진짜사나이가 되어가는 출발점이다라고 생각하고 주어진 교육에 성실 하게 임하여 1.2 3 등 수에 오른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부대에 배속 받을 수 있는 특혜를 받게 될 것이다” 며 “머지않아 우리나라에도 My car시대가 올 것이다 이곳에 온 제군들은 행운아들임을 명심하고 충실히 노력하여 좋은 성적으로 전과정을 잘 마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교관은 우리 모두에게 국민교육 헌장을 읽게 하면서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중략…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나라를 사랑하자”라고 하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마음에 두고 열심히 노력하여 훈련 과정을 모두 마치고 졸업 할 때에 등수안에 들어서 기술을 더 배울 수 있는 부산병기 차량 창에 배속되어 값진 경험을 하고 68년 9월14일자로 만기제대를 하여 군대에서 배운 기술로 자격증도 하나,둘,씩 취득해가며 군대 선배의 도움으로 직장을 얻었다. 그 후 나는 결혼도 하고. 딸, 아들, 우리 4식구들과 함께 가정을 이루며 생활했다. 제대후에 의무적으로 받는 향토 예비군 훈련에도 참여하면서 옛 군대 동료들을 만나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장래의 살아 갈 길을 늦도록 의논했다. 그러나 당시의 현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장래의 아이들 교육이나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기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던 중 당시 독일 광부 모집과 사우디 아라비아 근로자 모집 등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혹 나에게도 그러한 기회가 올까 하고 아침 일찍부터 그 대열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캐나다 이민의 꿈
안국동 뒷골목 해외 직업 소개소를 찾아 다니던 그 힘든 시절에 우연히 처가쪽으로 먼 친척 되는 분이 캐나다에서 학위를 받고 성공하여 고국에 잠깐 다니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만났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평범한 한국사람도 그런 나라에 가서 살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기술자는 이민하는데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며 용기를 주었다. 그 때부터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자격증과 이력서를 영문 번역하여 공증 받아 그 친척이 있는 캐나다로 보낸지 3여년만에 (구하라 구할 것이 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 )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편지와 함께 CANADA Vancouver에 있는 Musgrove Ford Sales Ltd 에서 채용해 주겠다는 (고용계약서) 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즉시 홍콩에 있는 캐나다 영사관의 승인을 받아 비자를 받고 반공 소양 교육을 받은 후 곧바로 NorthWest Orient Airline에 캐나다 에서 보내온 고용계약서를 보이고 우리 가족 모두 월부상환 외상 비행기(Fly Now-Pay Later Application)을 내었더니 비행기표가 나와 일본 나리타 공항을 경유하여 시애틀을 거쳐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였다.
밴쿠버에서의 시작 … 우연이 필연이 되다
처가쪽 친척 분들의 따뜻한 마중을 받으며 그 분 집에서 일주일 가량 4식구가 함께 기거하다 방을 구할때까지 또 다른 한인분의 집에서 몇일 지나는 중에 마침 가구가 포함 된 아파트가 고용된 회사의 근처에 있어서 입주하였다. 다음날 한국 영사관에 입국 신고를 하고 고용된 회사를 찾아갔더니 자동차 보험 회사 ICBC가 Strike 를 하여 3개월 후에야 일을 시작하게 될거라 하였다. 그동안 임시 일자리를 구하려고 근처 Manpower 사무실에 찾아가 나의 형편을 얘기하였더니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 담당직원이 1개월 아파트 랜트비와 약간의 생활비로 400달러 수표를 주면서 어려우면 다시 또 오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아! 이렇게 좋은 나라가 세상에 다 있다니! 참으로 좋은나라로구나! 열심히 노력하여 은혜에 보답해야지’라고 나는 다짐하고 식구들을 위로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감사드렸다. 며칠후 다시 일자리가 나왔나하고 Manpower 에 가 보았더니 구인 광고가 있어 가 보았다. 그런데 주소를 잘못 찾아서 자동차 수리를 취미로 하는 젊은이를 만났다. Mr Oliver Neeld 씨는 Pacific Auto Body라는 면허를 가지고 자기 집 조그마한 차고에서 사고차량을 수리하고 있었다. 그가 나의 형편을 듣더니 찾아가려는 주소는 국수 공장이니 가서 신고만 하고 다시 여기와서 자기 하고 일을 하자고 권유했다. 그래서 나는 ICBC Strike 가 끝날 때까지 함께 일을 하기로 했다. Olive씨의 작업복을 입고 바로 일을 시작했는데 Olive씨는 내가 일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일거리를 많이 얻어왔다. 그렇게 일한지 2개월이 되었을 무렵 폐차장을 하는 자기 친구로 부터 73년도 Toyota station wagon 폐차된 차량을 가져와 수리를 (Rebuilt) 하여 검사를 받더니 합격했다고 하면서 내이름으로 자동차 등록을 해주어서 중고차지만 난생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된 내 차를 가졌다. 곧 이어 고용된 회사에서 오라 하여 나는 그 해 1975년 9월 부터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4년 2개월만에 월부외상비행기 값을 갚고 한국에 있는 형제들을 그리워하며 송금도 조금씩 하였다. 나는 지금도 고국과 어머니가 계신 서쪽을 향하여 바다가 보이는 West side of the Burnaby Mountain서 건너다 보며 ‘바다위로 반쯤 안개가 항상 걸려있어 하나님의 입김이 운행 하시더라’ 라는 말씀을 상기한다.
글 사진 양영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