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처음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당시 NPA당 소속 시장후보 선출에서 패배해 후보로 오르지 못했고 이번 선거에서 신당인 ABC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사진=RIC ERNST
10월 15일 지방시 선거에서 차기 밴쿠버 시장으로 켄 심이 주목받고 있다. 그는 이민자의 아들로 시청 근무경력이 전무하며 최초의 비백인계 밴쿠버 시장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켄 심, 누구인가?
그의 정치력은 상대적으로 짧다. UBC에서 학위를 받은 그는 회계사와 은행가의 일을접고 너스넥스트도어(Nurse Next Door)와 로즈메리록솔트베이글(RosemayRocksaltBagles)을 설립해 성공적으로 운영해 왔다. 티나 굽타와 결혼, 슬하에 4명의 아들이 있다. 2018년에 처음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당시 NPA당 소속 시장후보 선출에서 패배해 후보로 오르지 못했고 이번 선거에서 신당인 ABC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중국인 이민자의 아들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대학 진학
시청 근무등 정치 경력 ‘전무’
시민 정신건강과 중독문제에 관심
Q: 부모님이 3천2백달러를 들고 3명의 자녀와 함께 1967년에 밴쿠버에 이민 오셨고 이민 후 당신과 다른 자녀를 출산하셨다고 들었다. 유년시절은 어떠했나?
A: 어렸을때는 그저 평범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많은 도전이 있었다. 7년 사이에 밴쿠버 5개 초등학교로 전학을 다녔다. 4학년때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는 VCR와 음식으로 가득찬 냉장고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엄마와 아빠는 늦게까지 일했고 새벽 3시면 일어나셨다. 엄마의 눈에 눈물이 맺힌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다음에는 어디로 이사할 지 걱정하셨던 것 같다.
Q: 월세 때문에 5개 초등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나?
A: 그렇다.우리는 월세를 낼 수 없었고 5명의 애들과 반려견을 받아줄 곳이 많지 않았다.
Q: 5학년때 10센트 코믹북을 이스트밴쿠버에서 사서, 버스를 타고 웨스트밴쿠버에가서 25센트에 팔며 돈을 벌었다고 들었다.
A: 어떻게 그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이스트밴 가게에서 사서 웨스트밴 가게에서 되팔며 돈을 벌다가 결국 부모님들에 들켜 그만두게 되었다.
Q: 밴쿠버에서 자라면서 인종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나? 지금까지 기억하는 특별한 사건이 있었나?
A: 어렸을 때 “중국인, 일본인의 무릎은 더러워”, “중국놈이 15센트로 25센트를 벌려고 앉아있네’ 라는 등 많은 인종차별 말을 들었다. 많은 상처를 받았고 52세가 된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는 훨씬 더 잘살게 되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그 순간속에서 살고있다.
Q: 처칠 세컨더리 학생일 때 갱단의 타켓이 되어 싸움을 했다고 들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받았나?
A: 8학년 때 친구들과 불어교실에 있었는데 레드이글즈인지, 로터스 인지 당시 갱단 애들이 갑자기 내게 달려들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했다. 당시 학교연락담당관와 상담할 수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Q: 11학년까지 처칠에 다니다가 12학년에 매기로 전학해 졸업했다고 들었다. 왜 전학했나?
A: 11학년때 너무 놀아서 11학년 불어를 낙과했다. 매기는 우리가 살던 지역에서 유일하게 학년제를 사용하는 학교였고 8학과 대신 10개 학과를 수강할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려면 불어 11학년을 마치고 12학년을 들어야 해서 전학이 필요했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하고, 나는 그 대가로 많은 친구를 떠나 학교를 바꿔야 했다.
Q: 고등학교 첫 아르바이트로 웬디스에서 야간 관리인일을 했다고 들었다. 재학시절 어떤 일을 했고 어떤 계기로 시장을 꿈꾸게 되었나?
A: 사실 시장을 꿈꾸기 시작한 건 4년반 전에 불과하다. 최저 시급일은 웬디스에서 시작했다. 시급 3.50센트를 받고 일했고 다음에는 캠비와 17가에 위치한 더치 오믈렛 하우스에서 시급 4달러를 받고 프렙쿡으로 일했다. 화장실 청소도 했다. 그곳 일을 그만둔 후 콜하버 케그에서 4.75달러를 받으며 프렙쿡으로 일했고 그 후에는 팬퍼시픽 호텔에서 버스보이로 일했다. 그때는 시급 8.65센트에 팁도 많아서 부자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랜빌아일랜드 호텔의 펠리칸베이에서 웨이터로 일했는데 가끔 1백달러 이상의 팁도 벌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Q: 52세가 될 때까지 한번도 공직에서 일한 경력이 없다가 시장직을 맡게 되었다. 개인회사를 운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를텐데 새 일자리에 어떻게 준비되어 있나?
A: 지난 4년간 우리는 BC주에서 가장 큰 시 정당을 창당했다. 이를위해 BC주 뿐 아니라 북미의 많은 정치가, 시청 인사들과 만나는 경험을 쌓았다. 나는 팀을 만드는 사람이고 4년간 시의원을 지낸 3명의 당원들이 나를 보좌할 것이다. 또 밴쿠버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력이 있는 전문가들이 도울 것이다.
Q: 다운타운 이스트에 살게된 지인 5명이 있고 2명은 사망했다고 들었다. 이 경험이 밴쿠버의 정신건강과 중독문제에 대한 접근법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나?
A: 한 명은 남동생의 트레이너였다. 그는 미스터캐나다로 뽑히는 등 많을 것을 성취했지만 부상후에 약을 사용하다 중독자가 되었고 결국 다운타운이스트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다른 지인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정신질환을 앓았다. 처방약을 끊은 후 다운타운이스트에서 살게 되었다. 정신건강, 중독, 홈리스 문제는 심각하다. 이들을 판단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의 개선책을 찾는데 큰 도전을 받게될 것이다.
Q:다운타운 이스트의 서비스 예산을 삭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
A: 서비스가 중단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부서를 두루 돌봐야 한다. 각 부서의 성과와 실패의 책임을 물을 것이며 성과가 높은 부서에 더 많은 지원을 할 것이다.
Q: 약 15년전 ‘케어소스’라는 요양소에 직원을 제공하는 사업을 운영할 때 고용문제로 비난을 받은적이 있다. 왜 이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나?
A: 케어소스는 약 5~6년간 운영되었다. 이력과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당시 이 사업은 큰 일자리 기회를 제공했고 사실 우리가 이룬 업적에 자부심을 같는다. 당시는 많은 간병인들이 BC주 전역에서 해고되는 시기였다. 해고된 간병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업이었고 몇개의 요양소와 계약을 맺고 일했다. 요양인이 필요한 곳에 일손을 제공하는 사업일 뿐이었다.
Q: 아직 이 회사를 운영하나?
A: 10년 전 쯤에 문을 닫았다. 요양소 대신 개인환자를 상대로하는 사업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판단, 너스넥스트도어을 공동창립 했다.
Q: 중국어를 배우라는 고인이 되신 어머니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나?
A: 그렇다. 엄마와 아빠로 부터 광둥어와 만다린어를 배우라고 들었다. 그렇지만 70년대에는 인종차별이 있었고 중국인 뿐아니라 남아시아인들이 학교에서 놀림을 당했다. 부모의 문화유산을 사랑했지만 차별의 대상이 되기 싫어서 중국어 대신 불어를 배웠다.
Q: 돌아가신 아버님은 원래 중국 광둥성 차오저우시 출신인데, 선거운동 중 차오저우협회 와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경험이 어땠나?
A: 우리는 그리스 지역 사회단체, 유대인 지역 사회단체, 구르드와라, 사원, 그리고 많은 사업 단체와 만났고 다양한 공동체들로부터 받은 모든 지원들이 흥미로웠다. 차오저우는 우리 가족의 3대, 4대, 5대의 역사를 갖은 곳이어서 마치 내가 마을의 일부라는 점이라고 느껴져 특별한 경험이었다.
Q: 부모님이 이민오셨던 1967년과는 이제 상당히 다른 환경에서 4명의 아들을 키우고 있는데, 아직 노동계층의 뿌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A: 물론이다. 내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일을 해야 용돈을 받았고 지금도 대학 등록금을 스스로 벌고 있다. 우리 애들은 공립학교(트라팔가, 킷츠)를 다녔고 나는 공립학교에서 다양한 문화경험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너스넥스트도어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들은 모두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다. 많은 직원이 필리핀에 가족을 남기고 밴쿠버로 와서 일하면서 필리핀 가족에게 돈을 보낸다. 이들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이곳에 왔고 일하고 있다.
Q: 오우라 스마트 반지를 끼고 있는데, 수면과 스트레스 수준을 추적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새 직장에서 얼마나 필요 할지?
시청일과 관련이 많다고 생각한다. 죽도록 일을 하고, 페이스타임도 하고 모든 일을 완벽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짧은시간에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람들도 있다. 오우라 반지는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건강을 잃을 뿐 아니라 일의 성취도가 낮아진다는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 나는 하루 4시간만 자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 반지로 수면을 추적하면서 6시간을 자고 7시간으로 늘리려고 한다. 더 짧은 시간에 더 효율적으로 일해 생산성을 높이는 개념을 시청에 도입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