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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전 24일, ‘355 고지를 기억하다’…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잊혀진 전투

2022-11-11 15:29:59

한국에서 살아남은 군인들이 귀향할 때는 1, 2차 세계대전의 군인들과 달리 환영 퍼레이드도 없었고 인정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참전용사들은 그후로 오랫동안 잊혀진 전쟁의 군인이었다는 오명과 싸워야 했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고왕산에서 발생한 전투…18명 전사

한국전에서 캐나다 육군의 두번째로

피비린내 나는 날로 기록

 ‘고지 355’는 캐나다에서 점점 잊혀지는 6.25 전쟁중에서도 잊혀 진 전투이다. 6.25참전 캐나다 용사들은 70년전 10월 23일과 24일에 발생한 이 전투를 회상한다. 퇴역중령 브라이언 시몬즈의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고지 355’ 전투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캐나다왕립연대(CRC)에 소속된 젊은 신호병 시몬즈는 중국 포병대와 박격포대가 첫 포격을 개시했을 때 대대 전초기지인 바위투성이 언덕위에 있었다.

92세의 시몬즈 퇴역중령은 노스밴쿠버 자택에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언덕은 포병 박격포와 기관총 소리가 난무했다”고 회상했다.

“낮에도 포탄으로 시끄러웠지만 중국 박격포대가 상륙한 후에는 총포 속에서 아군의 일부가 부상당하거나 죽어 갔다.”

본부로 돌아오는 길에는 포탄이 머리위에서 휘파람을 불 듯 지나갔고 꽝꽝 두드리며 흙과 먼지를 내뿜으며 산비탈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언덕 꼭대기 전체가 폭발한 듯’

전투에 참가한 다른 군인들은 중국의 포격이 너무 강렬해서 언덕 정상의 1피트가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고지 정상 전체가 단번에 날아가 버린 듯 했다.”고 고든 베넷 전 상병은 말했다.

시몬즈 전 중령은 불길에 휩싸인 언덕을 내려갔고 캐나다에서 막 도착해 지프차를 기다리던 한 젊은 장교와 마주쳤다. 둘은 잠시 인사를 나누고 갈 길을 갔다.

사령부를 지키던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시몬즈 전 중령은 불과 한시간전에 젊은 장교와 마주친 지점에 중국 박격포대가 착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젊은 장교는 한국에 도착한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머리에 치명상을 입었다. 시몬즈는 가슴이 아팠다.

‘고지 355’ 전투는 70년전인 1952년 10월 23일과 24일에 걸쳐 벌어졌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고왕산에서 발생한 이 전투는 시몬즈에게는 첫 주요 전투였고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전투를 한국전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보고 있으며 수 십년 간 전쟁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전투로 꼽는다. 시몬즈에게 그 경험은 어떤 역사 교과서보다 더욱 생생했고 개인적인 것이다.

 

어둠 속에서 벙커 폭발하기

그는 캐나다왕립연대 B중대가 폭격으로 혼란으로 빠졌을 때의 사령부의 긴장감과 두려움을 잊지 못한다. 언덕 꼭대기에 얼떨떨하게 있던 병사들은 언덕을 기어올라 통신 참호를 통과하는 중국인들의 물결에 직면했다. 캐나다군은 밤이 되자 소대로 집결해 조용히 도망하거나 죽은척하기도 했다.

“우리군의 반격이 중국부대를 단념시킬것이라는 희망 밖에 없었고 중국군대가 어떤 무기를 갖고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른 두 RCR중대는 밤사이 반격을 했고 베넷 전 상병은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캐나다포병대가 파고들 기회가 없던 중국군을 반격한 것을 기억한다. 베넷 전 상병은 어둠속에서 벙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밤이든 낮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두려웠고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예상해야 할 지 몰랐다. 다만 싸워야 하는 것을 알았다. 가시성은 나쁘지 않아 길이 보였고 목표도 볼 수 있었다.” 그는 “벙커속에 아군이 있을지도 몰라 마구 폭탄을 던질 수는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날이 밝았을 때 베넷은 여기저기 전선이 흩어져 있을 것을 보고 처음에는 손상된 전화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중 다수는 캐나다군이 급히 설치한 부비트랩 중 선을 당겼을 때 폭발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 전투는 한국전에서 캐나다 육군의 두번째로 피비린내 나는 날로 기록되었다. 18명이 사망하고 35명이 부상당했으며 14명은 포로로 잡혔다. 한 역사학자는 ‘이 전투는 전쟁의 분수령 이었다”라고 말했다.

캐나다전쟁박물관의 앤드류 버치 씨는 “355 고지 전투와 1952년 10월은 새 국면을 맞이했다”고 했다. 중국군과 UN군은 더 이상 서로의 전열을 뚫고 극적인 전진과 철수를 하지 않았다. 전쟁은 아군과 적군이 피와 인명의 희생을 교환하며 쓰라리고 힘든 교착상태로 변했다.

참전용사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전쟁의 단계로, 얼굴이 없고 번호로 메겨진 이름없는 언덕을 오르고, 싸우고, 큰 비용을 치룬 전투들이었다.

“중국과 UN은 서로를 하얗게 만들때까지 피를 보기로 하는 것 같았다.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에 서기 위한 작전이었다.”라고 버치는 말했다. 협상은 결국 1953년 여름 남북분열을 초래했다.

버치 씨는 355 고지전이 또한 캐나다인들이 한국전에 관심을 잃기 시작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한국에서 여전히 싸우고 죽고, 포로가 되고 있었지만 캐나다에 있는 사람들은 한국도 잘 몰랐고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살아남은 군인들이 귀향할 때는 1, 2차 세계대전의 군인들과 달리 환영 퍼레이드도 없었고 인정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참전용사들은 그후로 오랫동안 잊혀진 전쟁의 군인이었다는 오명과 싸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