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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새로운 변화의 등장

2019-12-20 00:00:00

현대 생활에서 누리고 사는것에대한 신종 의존증(중독)이 생겼다. 차를 타고 가다보면 운전석에 앉아서 휴대폰 사용과 커피잔 들고, 그러다 경찰에게 걸리면 “아이쿠 변을 당했네” 하고 있다.

잠시라도 휴대폰이 없으면 어떠한가? 마구 불안하든지 답답하든지 일상생활이 거의 마비가 오는 정도이다.
너무 깊이 빠져있고 의지하고 있기에 영혼 없는 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면 정지시키려는 어른들을 보면서 자각할때가 있다.
나 또한 할일이 눈 앞에 수두룩 한데도 그걸 붙들면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가 버린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나름 핑계가 그럴싸하다 알고 싶은 정보를 알려주고 시간을 단축시키고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온 세상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알고자만하면 바로 알 수 있는 편리함이 있는데 어찌마다 하겠는가?

꼼짝없이 노예생활이다.
그 여파로 사람냄새 나는 관계없이도 살아갈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서로 얼굴을 대하면서 서로의 생각에서 화합 하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면서 삶이 이어져 가야 하는데 현대생활의 패턴 이라면 기계끼리 만나서 느낌없는 전달에 그치고 마는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 많은 정보와지식은 획득 하지만 뭔가 채워지지않는 결핍의 공허함은 또 다른 위안을 찾아 나설수 밖에 없다. 그런 삶은 자신의 일상이 그닥 맘에 차지도 않고 현재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아진다. 그 다음은 그 생활 아닌 다른 것을 동경하고 또 다른 도피처를 찾게 된다. 그건 아마도 그물에 걸린 빈 프라스틱 병이나 깡통같은 거와도 같은 것이다 소중한 보물은 이미 그물 사이로 빠져 나간 뒤 이므로…..우리 일상의 하찮다고 여기는 살아서 할수 있는 모든 일들이 보물임을 모르기에….이때 어딘가에 도피처를 찾는 것이 요즘에 와서는 가장 빠르고 쉬운 일이 미디어 신종 의존증이다. 이 일은 어느시점에서 멈추어야할때 그렇게 되지 않고 생활에 손해를 끼치고 불편함과 지장을 초래하면서도 다른 일로 옮겨가야 할때 끝을 내지 못할 정도로 그런 현상이 재현되는 것을 우리는 중독이라고 말한다.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진 중독도 있지만 알려지지 않고 그다지 큰 문제라고 여겨지지도 않으며 수긍되지도 않는 부분의 중독 즉 미디어의 중독이다.
우리는 정보시대에 살면서 그것들의 모체인 인터넷에 삶을 저당 잡혀 살아가고 있는데도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 이 미디어에 대한 특징 이라면 특별한 중독 현상에 젖어 있지도 않고 그런 가족들도 주위에 없는데 자신의 생활을 처리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기저기 방법을 찾아 다니지만 뚜렷하게 처방이 없이 시간을 보내다 술이나 도박 약물등으로 흘러갈수도 있고 사회적인 규범이나 종교적인 계율에 메이거나 주위의 이목 때문에 눈에 드러나는 중독의 성향으로 가지도 못하고 생각의 갈등에 사로잡혀 고통스럽게 사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중독성향으로 간 사람들만큼이나 가슴 앓이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고통들은 강박증으로 연결되어 생각에 묶여서 헤메고 있고 은신처라고 생각했던 미디어의 세계는 의지할 수 없고 답도 주지 못한채 반응은 묵묵 부답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무슨 결핍으로 인하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지만 시원한 꼴을 보지못하고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세상에서 낙오자가 될 것 같고 소외 될 것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요즘은 부부사이나 부모 형제간이나 서로 할말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다. 이것은 신종중독의 문이 열리는 징조라고 볼 수도 있다. 나의 남편은 무슨 할말이 있으면 나의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왜 그랬을까?
남편은 단순한 사람이기에 특별한 의도 없이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하다보면 나의 입장을 곤란하게 할때도 있었고 그럴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도 되기에 누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언쟁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러기에 우리에겐 대화란 것이 싸움하는 전초전이 되어 버렸었다.
그러니 서로가 경계하고 꼭 해야할말만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말하는 것보다는 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 했기에 건너뛰고 묵인하고 때로는 서로 무시하고 살아 왔었다.
또한 원인은 수긍하지 못한채 결과 즉 말꼬투리만 잡고서 서로 저지시키고 싶어하고 판단하고 흉보고… 이런 짓거리들을 해 왔었다.

이때 뭔가 또 다른 해소의 길을 찾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사랍들은 꼭 해야 할 일을 하지않거나 못할 때는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가담하게 되어있다. 우리부부는 그렇게 되었다. 휴대폰 하나씩 가지고 각자 방에 들어가면 모든 유토피아의 새 세상이 펼쳐진다.
부부사이가 그럴진데 부모 자녀관계야 오죽 하겠는가?
이렇게 소통이 끊어지고 그 통로라고 여기는 이 기계는 뒷 말도 없고 나를 비웃지도 않고 거역하지도 않으며 안전함과 편리함이 함께할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새로운 창조세계의 최고의 극치이다. 하지만 관계회복이라는 일은 우리를 재촉한다 “불편하다”고  지금 나의 남편은 말을 많이 한다.

나와 있을때도 다른 사람을 만날때면 더 많이 말을 한다. 이젠 그 말들이 그다지 걱정 되지도 않고  귀에 거슬리지도 않으며 나의 눈치도 보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이런 시간이 도래하게 되었다. 듣는 귀는 열렸고 미워하고 비판하는 입은 저절로 닫혀가고 있으며 말을 많이하는 남편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건강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이 작은 일이 일이 풀어지지 않는 인간관계는 무겁고 답답할 수 밖에 없고 사람에게서 묶여진 매듭은 사람에게서 풀어야한다고 하듯이 이것 저것 다 해 보았지만 시원한 답을 찾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이 병이란걸  인정하고 알고 나서부터는 치료와 회복이 평행을 이루었던것 같다. 이 일은 분석하고 이해하고 연구해서 해결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여파로 걱정과 불안이 동반되고 어떤 생각에 사로 잡히면 멈추지를 못하고 그럼으로 인하여 사람 만나기가 싫어지고 누굴 만나도 의기소침해지며 급기야는 만성불면증의 증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어느새 몸과 맘이 함께 고통스럽고 몸의 고통 때문에 마음이 우울한건지 마음이 우울하니 몸이 아픈건지 의사도 딱히 진단을 내릴수 없는 형편이라 “못 견딘다”는 말이 가장 적절한 말인것 같았다.

옛날 어느 마을에 욕쟁이 할매가 눈만뜨면 누굴 붙들고서라도 욕을 했다고 한다. 그 할매가 그 동네에서 가장 장수한 할매 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욕을 해서 오래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닐것이다.
이 할매가 한 욕 안에는 할매의 억울이가 토해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 억울이가 나오는 통로를 찾지 못하면 병이 생긴다. 이름하여 “못 견디는 병”이다. 말 않하면 귀신도 모른다고 했던가? 자신의 억울이를 끄집어 내어 직면하는 일은 쉬운일이 아닐거라고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움직임을 느낄수 있기에 하지 못하는 일 어렵기만한 일은 아니었다. 내 안의 억울이가 줄줄이 사탕처럼 딸려나오는 경험을 한후 나 그 못견디는 희귀한 병에서 해방되었다.

꼭 그 작업이 필요한가?라고 질문하는 이들이 있다. 나의 억울이가 나오기 시작 할때 그 나온 자리에 이상한 새 힘이 자리 하는걸 느낄수 있었고 나와 인연 맺은 사람들과의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져감을 경험할수 있었다.
동의보감에서는 병과 치료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더 강렬한 어필은 생명을 이야기 하고자 함이다. 오늘 나눈 이글들 모두도 그러하다 어둡고 무거운 숙제같은 이야기 인듯 하지만  생명과 희망을 이야기 할 뿐이다 함께해주신 구독자 여러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