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중 심사위원의 제 3회 글짓기 대회 심사평

2025-06-19 16:05:04

사진 이지은 기자

총 80여 편의 작품이 응모했다. 주제가 가족이라선지 가족과 같이 쓴 것 같은 글이 있었다. 쳇지피티 (Chat GPT)를 이용했다고 의심이 들 만한 글도 있었다. 보내온 글은 평년수준을 넘지는 못했다. 주제가 너무 평이해서 좋은 글을 쓰기가 더 어렵지 않았나 생각한다. 주제가 일상적이다 보니 글쓴이들의 감동이 어떤 감동인지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감동은 일반적이고 상투적이어서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주최자가 응모자를 고민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여기 모든 응모자는 물론, 캐나다에서 태어난 응모자도 한국어에 대한 숙지도가 높았다. 이 점 2-30년 전에 비해 달라진 점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모두가 행복해선지 개인적 경험에서 나오는 차별화된 구체적 소재를 찾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본다. 상 받는 수상자들 간의 차이도 크지 않아서 작은 상금 만큼의 차이도 없었다.

대상 <가족, 나를 울린 하드보드지>
가족에 대한 사랑을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까지 사고를 확장한다는 것은 쉬운 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알아가면서 알았다는 점이 지금 세대의 사고로는 신선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를 확장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단순하고 상식적인 대답에 부응하는 점이다. 그것이 지금 나이를 먹은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어렸을 적 일이라면 이런 글은 상투적일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분단의 상처를 잘 모르는 지금 세대가 쓴 이 작품에 주목한 이유다. 글을 쓰는 일은 관찰을 토대로 하는 일이다. 더 넓은 관찰, 깊은 사고를 가지기를 기대한다.

A군. 최우수상 <가족>
의미를 찾는데 집중하느라 의미를 이야기로 전환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이런 부족함을 모두 극복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짜임새가 높은 점을 장점으로 보았다. 의미를 날것 그대로 쓴다면 학술에 가까워진다. 비유나 상징을 사용해서 깊은 감동을 주는 글을 쓰기 바란다.

B군 최우수상
<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
시의 틀을 잡고, 전개는 좋았지만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평범한 결말이어서 이 점이 시 전체의 의미를 제한적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흠이 되었다. 선자의 생각으로는 이런 당연한 결말은 작품 전체를 안일하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 결말을 말하기 위해 전반부의 세심하고 풍부한 전개를 더 고민하거나, 전개를 그대로 놔두고 더 의미 있는 결말을 고민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나 생각한다.

A군 우수상 <준비되지 않은 이별>
같이 자란 형제들도 부모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같은 집에 살며 자랐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다르다는데 놀란다. 이 글은 자신의 추억과 경험을 어떻게 완성해 가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일종의 자신만의 경험으로 편집된 추억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가지게 되는 귀중한 선물이다. 이 글은 7살부터 17살까지의 성장의 일면을 보여주는 단서를 글로 썼다고 본다. 군데군데 손이 갔으면 하는 부분은 작자가 다른 글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고쳐나가리라고 본다.

A군 우수상 <가족이란>
이 시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거기서 결론을 끌어내는 방법을 썼다. 답은 질문에 있다는 답재문처(答在問處)를 <벽암록 14칙 평창(評唱)> 떠올리게 한다. 질문할 수 있으면 답을 가질 수 있다. 어떤 답을 얻느냐는 질문하는 사람의 몫이다. 운문의 형식을 빌렸지만 서술적으로 흐른 점이 흠이다. 그렇지만 전반부를 시작하는 방법이 좋았고 나름의 반전도 있었다.

B군 우수상 <80억 명의 가족>
80억 명의 사람을 가족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통 큰, 이 글의 작가는 자신의 상처를 승화시키려고 노력한다고 느꼈다. 글쓴이는 자신을 반추하고 반추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때로 납득하기 힘든 일을 납득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시간을 글로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며 이 글의 성과가 아닐까 추측한다. 다듬어야할 표현이 눈에 띄지만 자신의 일을 객관화시키는 능력이 더 돋보였다.

B군 우수상 <낯선 땅, 익숙한 사랑>
대체로 짜임새 있는 글이었지만 너무 평이했다. 편지투로 쓰이는 글도 많지만 거기에는 수신인이 아닌 사람도 수신인이게 하는 객관화가 들어있다. 나와 남의 글이 같다면 나를 차별화할 수 없다. 나의 인생은 남의 인생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특별함을 냉정하게 사색하면 남과 차별화된 자신만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과 마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과 마주한다는 말과 같은 말일 것이다. 인생을 꼭 살아야 하는 것처럼 글을 꼭 써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럼 어떻게 쓸 것인가? 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문제지만 항상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일도 아니다. 다른 언어권에서의 경험과 사춘기,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는 일은 자라면서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하는 생각은 내가 쓴 글보다 더 복잡하다. 글을 쓰는 행위는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일이지만 나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썼느냐 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을 쓰느냐의 문제다. 노벨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자신이 쓰려고 하는 소설을 구상하고 그것을 머리에 굴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떤가? 소설이나 글을 구상하고 머릿속에서 굴릴 때 행복하다면 이 말은 근본적으로 상을 타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좋은 글을 썼기 때문이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상을 받는 여러분의 행복을 폄하하거나 부정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은 무엇인가? 남에게 인정받았다는 결과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이것도 무엇을 쓰느냐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