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는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싼 높은 산에는 여름에도 흰 눈이 덮여 있고, 뗏목이 떠내려가는 큰 강에는 서부 개척 시대를 연상하는 낭만이 피어오른다. 청정한 바다, 시원한 파도, 수목으로 잘 단장되고 잘 정리된 도시는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어둔 그림자가 짙듯이 이 도시 또한 단점은 있다. 그것은 바로 겨울에 내리는 비 때문이다. 늦가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봄까지 내린다. 전에는 우산 없이도 걸을 수 있는 운치 있는 가랑비였으나 요즘은 겨울 비도 유난히 억수같이 내려 여름 장마를 연상케 한다.
내가 처음 밴쿠버에 왔을 때만해도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그렇게 많이 본 것 같지 않다. 레인코트에 겨울 가랑비를 맞으며 걷는 모습에서 일종의 운치를 느끼곤 했다. 그러나 이젠 비를 대체로 싫어하는 동양인들 뿐만 아니라 서양인들도 손에 우산을 들고 출근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비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런 비를 지겹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불평이고, 불만이다. 허구 헌 날 비가 내린다고, 원성이 높다. 특히 처음 이민 온 한인동포들이나 다른 곳에서 밴쿠버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게서 듣는 공통적인 불만은 바로 겨울의 비에 대한 것이다. 심지어 겨울 비가 자꾸 내려 우울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이 살기엔 밴쿠버는 지옥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처음에는 밴쿠버의 겨울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수석의 취미를 갖게 되면서 비 오는 날에 탐석(探石)을 하러 갈 수 없기 때문에 비를 탓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도시에 익숙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새 비를 좋아하게 되었다.
난 눈이 많이 내리는 유럽의 스칸디나비아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눈이 내리는 북구(北歐)의 겨울은 그림엽서에서나 볼 수 있는 멋과 운치가 뛰어나지만, 눈으로 인한 불편한 점도 많이 있다. 특히 눈이 많이 내린 길을 자동차로 다니기는 위험하기도 하고, 매우 불편하여 겨울이면 운전에 매우 조심하게 된다.
북구가 아니라도, 에드먼턴이나 캘거리의 사람들이 겨울에 얼마나 고생하는가를 익히 알고 있다. 특히 토론토는 겨울이 춥고 눈이 많이 내려서 눈 때문에 고생하는 얘기를 신문이나 방송을 통하여 수시로 듣는다. 특히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BC주 중북부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고 눈 폭풍과 눈사태로 많은 인명피해를 겪은 것을 듣게 되면서 밴쿠버에 눈 대신 비가 내린다는 것은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밴쿠버는 비가 많이 내리기는 하지만, 물 빠짐이 좋아서, 도시의 어디를 가도 비 때문에 질척거리지 않고,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물난리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없는 특이한 도시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비를 탓하거나, 비를 원망하는 얘기를 듣기 힘들다. 도리어 비를 좋아하며, 비를 즐기며, 비가 내려도 스탠리공원 해안 길에는 늘 산책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나에게 비는 무척이나 정겨운 손님과 같다. 창가에서 커튼을 열고,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면 마음이 평정해진다. 마음 속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낀다. 비는 가슴을 어루만지는 진정제이며, 비는 마음을 정갈하게 씻어주는 청정제이다. 그리고 비는 귓가에 도란도란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옛 친구와 같다.
가끔은 레인코트를 입고, 비가 내리는 해안 길을 걸어본다. 빗속에 피어나는 비에 젖은 수줍은 들꽃을 보기도 하고, 해변에서 비에 젖은 바다를 응시하기도 한다. 아마도 비가 있어 내가 밴쿠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