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2일 화요일Contact Us

제2회 청소년글짓기공모전 장려상 수상작

2024-10-22 14:09:38

장려상 B 조민우

비 냄새

한국의 후덥지근한 장마철 어느 여름날, 공책이 가득 들어 어깨를 짓누르는 책가방을 메고 축 처진 슬라임 마냥 학원을 향해 걷는다. 시선은 약 45도 아래를 응시하면서 쭉 걷다 보면 하나, 둘, 야속하게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특유의 맞물린 패턴으로 빽빽이 박혀있는 빨간색 그리고 초록색 한국식 보도블록들을 추적추적 적신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습한 날 내리는 비에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비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 후끈후끈한 아스팔트가 식으면서 눅눅하게 코를 찌르는 이 젖은 아스팔트와 먼지 냄새. 이 쿰쿰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서 빗줄기가 굵어진다.

허겁지겁 가방 깊숙이 박혀있는 우산을 꺼내 애써 막아보지만 한국 비 특유의 눅눅함과 비스듬히 내리는 굵은 빗줄기는 내 작고 소중한 우산 따위로는 막힐 리가 없다. 사정없이 내리는 빗물이 내 빳빳한 긴 청바지를 눅눅하게 적시면 불쾌지수는 급상승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제 엎친데 덮친격으로 내 어글리 슈즈 운동화로 웅덩이를 밟아버리면서 피날레가 장식된다. 정말 생각만 해도 불쾌하고 짜증이 나는 이 냄새는 잊을수가 없다. 그리고 이 경험은 한국에 산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번은 해봤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12년이라는 세월을 한국에서 이 지긋지긋한 비와 함께 보내고 나는 밴쿠버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 여기에 와서 이곳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꽤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처음 비를 맞는 순간 나는 정말 크게 놀랐다. 비가 너무나도 부드럽게, 보슬보슬 내리는데, 12년 동안 매번 맡았던 그 습한 비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곳 밴쿠버의 비는 정말 신기하다. 아무리 우산 없이 비를 정통으로 맞아도 비가 그치고 조금만 지나면 신기하게도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옷이 말라있다. 처음에는 이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지만 어느 날 생각해 보니 이곳의 비에는 그때 그때의 기억이 강력하게 남지 않았다. 비 오는 날 그 쿰쿰한 냄새도 나지 않았고, 너무 싱거운 것 같았다.

이렇게 건조한 밴쿠버에서 6년 동안 살다 보니 하루하루가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는 느낌이 든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금방 마르는 비처럼 정말 가볍게 지나가는 것 같다. 학교에서 받는 공부 스트레스도 한국만큼 심하지 않고, 일상에 여유가 있다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러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한국의 비 냄새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 지독한 비 냄새도 미운 정이 들었나보다. 비가 많이 내리는 밴쿠버에서 한 번씩 한국의 기억을 회상해보면 무더운 장마철에 맞았던 그 눅눅한 비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 지긋지긋하게, 끈질기게 나의 불쾌지수를 폭발시켰던 비 냄새가 이 먼 타지에서도 내 기억 속 한 편에 고집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2022년 여름, 밴쿠버로 이민 온 지 4년 만에 드디어 한국에 가게 되었다. 벅찬 맘으로 돌아간 한국은 첫날부터 이례적인 폭우 사태로 몹시 젖어있었다. 인천 공항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숨이 막힐 듯 느껴지는 습도와 그 사이를 뚫고 코를 찌르는 한국의 비 냄새가 나를 가장 먼저 맞이했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 냄새를 곰곰이 따라가 보니 내가 어릴 적 살았던 동네, 그 마을의 습도, 눅눅한 빗속에서도 매일 함께했던 친구들, 비를 피하기 위해 자주 갔던 학교 앞 문구점, 더운 여름날 나의 피난처가 되었던 시원한 편의점, 그리고 나의 영원한 소울푸드, 500원 짜리 컵 떡볶이와 함께 나의 어릴 적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세상 처음으로 이 지독한 비 냄새가 좀 기특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인생이 이 눅눅한 비 냄새 같았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지나가면 모두 아련하고 은은한 추억들로 되돌아오니까. 나는 내 인생의 순간순간이 이 비 냄새처럼 강력하고 매번 전율을 주는 충격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매 순간을 열심히, 의미 있게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씩 추억에 젖어 한국이 그리울 때면 눈을 감고 비 냄새를 찾아보자. 이것이 타임머신이 되어 가슴 한 편에 눅눅하고 쿰쿰했던 빗줄기들을 뽀송뽀송하고 향기로운 추억들로 말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