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이 반복될 때 대부분은 나보다 먼저 살아온 삶을 훔쳐본다. 먼저의 비슷한 사례를 찾아서 내 경우와 비교해 본다. 어설프게 흉내 내고 반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스며들고 익숙해진다. 이렇게 배움의 시작에는 모방이 있고 모방의 밑에는 욕망이 있다. 이미 태어났으니 기왕이면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무리 안에서의 인정 욕망이다. 변화가 빨라지고 복잡성이 증가하면 어떤 것을 모방해야 하는가 하는 선택 문제가 중요해진다. 무엇을 따라야 할지 어려운 이유는 가치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솔직한 질문은 위험할 수 있다. 어느 날 이 위험한 짓을 아들 칫솔이 아빠에게 했다.
“아빠 우리는 누구지?” 당돌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빠는 다음 세대를 가르친다는 마음으로 찬찬히 설명하였다. “우리는 인간들의 구강위생을 담당하는 칫솔이란다.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등지에서 나뭇가지 끝을 으깨어 칫솔처럼 사용되었고, 조선시대에도 버드나무 가지를 물에 불려 부드럽게 만들어 썼다고 해. 최초의 털 칫솔이 15세기 중국에서 동물의 뼈 손잡이에 멧돼지 털을 심어 만들어 칫솔처럼 사용됐다 하고 20세기 들어와 듀폰사가 동물 털 대신 나일론 섬유를 칫솔모로 사용한 현대적 플라스틱 칫솔을 개발해서 우리와 같은 칫솔이 탄생했단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는 인간들의 구강위생을 담당하고 있지. ” “…. 그런데…. 아빠는 왜 신발 닦아?”
위는 정체성으로 혼란스러운 두 칫솔의 세대 간 대화이다. 세상이 혼란스러우니 모범이 될 만한 타인들의 삶을 훔쳐본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평소 행동이 다를 때 혼란스럽다. 윤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삶이 전혀 윤리적이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새로운 기술이 발명되고 새로운 사실과 정보를 알게 되면 그에 따라 해석도 변하기 마련이다. 해서 정보가 넘쳐흐르는 현대에 온전히 집중하고 믿으며 한가지 해석에 머물기 쉽지 않다. SNS에는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정보가 쌓이고 가짜 뉴스와 넘쳐나는 해석들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어트린다.
전염병이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는 때가 팬데믹이라면 지금은 인포데믹. 바야흐로 탈진실의 시대이다! 일상에서 온전히 정신 차리며 살기 힘들게 하는 혼란은 이제 한 개인 문제를 넘어 사회구조를 살펴보게 한다. 정보의 공격은 개인의 다양한 방황들과 불안을 통해 몸을 공격한다. 혼란에 시달리는 면역체계는 스트레스로 몸의 항상성을 지키기가 버겁다. 몸은 외부의 침입자와 내부의 아군을 혼동해 이제 자신의 몸을 공격한다. 다양한 자가면역질환은 그래서 시대가 낳은 질병이다. 혼란스럽기는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한평생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는데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의심하지 않고 일관성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 일관성의 확고한 기억은 변화가 끊임없이 일으키는 거품을 헤치고 전진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 일관된 정체성이란 자아의 확신이 당장의 쾌락과 이익이라는 거대한 유혹을 견디고 나를 내일로 이어주는 힘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주위가 복잡해질수록 주변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날로 증가하는 복잡성과 인권이 중요해지면서 개개인의 의사표시와 선택이 더 중요해졌다. 이제는 많이 아는 지식의 총량보다 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지식이 더 가치가 있다. 일반지식을 얻는 것이 쉬워지면서 나에 대한 지식은 특수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구글에서 정확히 알기 힘들다. 해서 나를 명확히 아는 지식이 선택에 중요한 판단 요소가 되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너무 확고한 정체성은 변화한 현재에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확고한 일관성은 이미 변화한 시대에서 타인에게 아집과 불통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하나의 직업. 국가. 종교가 거의 한평생 유지되던 때가 있었다. 한번 정규교육을 잘 받아서 평생에 걸쳐 활용했던 때 좋은 때였다. 지금은 직업도 여러 번 바뀌고 국가도 이동한다. 처한 상황에 따라서 요구받는 역할이 계속 변한다. 이런 변화 안에서는 너무 확고한 정체성보다 적응의 유연함. 복원력. 회복탄력성이 더 실용적이다. 정보는 촘촘하게 얽힌 네트워크를 타고 파도처럼 끊임없이 퍼져 나간다. 이런 사나운 정보의 바다에서 등대를 만들어 자신의 정당성을 등대처럼 번뜩이는 건 어쩌면 혼란스러워하는 인간들의 약한 본능인지도 모른다. 나를 지키기 위한 여러 현상은 아집. 왜곡. 자기 정당화. 분노의 뉴스들이 또 다른 파도가 되고 그 안에서 수영하는 현대인이 요즘의 한 풍경처럼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소통하는 것이 한 행복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미니멀리즘이 유행이 되고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쾌락. 명상과 조용하고 단순한 삶이 유행이다.
정체성을 찾고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찾아보면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에는 안정적인 자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강조했다가 요즘에는 자아가 고정된 한 가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는 모델로 이해하는 목소리들이 크다. 오래전부터 불교는 고정된 자아라는 실체는 없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자아를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접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결국 개인이 소유한 확고한 자아 이미지는 근대가 구축하고 공고하게 만들어 온 정신의 건축물인 셈이다. 고정된 확고한 자아 보다 변화하는 상황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나를 만나려 찾아가는 여행길. 변화하는 일상에서 성숙한 나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 또한 지금의 안전함. 편안함을 고집하는 타인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을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는 짐작으로 지켜봐 주는 사랑. 그러한 성숙한 사랑의 마음들이 지혜의 정원에서 만나 소통의 아름다움을 피우는 풍광을 꿈꾸며 아기 칫솔을 생각한다. 지금도 그 아기 칫솔은 이빨을 닦고 있을까? 한 아빠가 되어 자기도 신발을 닦으며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을까? 아니면 이미 쓰레기통에 버려졌을까?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