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Executive Hotel, 영토해양문제 세미나
주밴쿠버총영사관(총영사) 주최 ‘영토해양문제 세미나’가 7일(금) 오후 6시 Executive Plaza Hotel(코퀴틀람)에서 개최되었다. 나용욱 부총영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 날 행사에는 이우석 625참전유공자 회장, 심진택 한인문화협회장 및 한인 120여명이 참석했다.
정 총영사는 “금요일 오후시간인데 많은 한인들의 참석을 보면서 독도 문제의 관심 가져주시는 것에 감사드린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특별강연에는 임한택 한국외국어대학교 초빙교수가 ‘한일관계화 국제법’이란 주제로 심도있게 설명했다.
임 교수는 조일수호조규(1876년),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 상해임시정부(1919), 한일협상(1954~1965). 한일기본관계조약,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어업협정, 한일대륙붕협정 등을 들어 독도가 한국의 땅임을 강조했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고유의 한국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이 존재하지 않으며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임 교수는 “독도 문제는 국익 추구의 정의에 따라 한일관계로 바라봐야한다”고 덧붙였다.
외교부가 발행한 독도 책자에 따르면 1906년 3월 28일 울도(울릉도) 군수 심흥택은 울릉도를 방문한 일번 시마네현 관민 조사단으로부터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날 이를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본군 소속 독도’ 라는 문구가 있어 1900년 ‘칙령 제41호’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독도가 울도군 소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 관찰사서리 춘천군수 이명래는 4월 29일 이를 당시 국가최고기관인 의정부에 ‘보고서 호외’로 보고하였고 의정부는 5월 10일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는 주장을 부인하는 ‘지령 제 3호;를 내렸다.
이에 비추어 울도 군수가 1900년 반포된 ‘칙령 제 41호’의 규정에 근거하여 독도를 관할하면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했다.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를 통해 한국 영토인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자 시도했으묘 당시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이권을 두고 러시아와 전쟁 중이었다. 1904년 2월 일본은 대한제국에 ‘한. 일 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여 러. 일 전쟁의 수행을 위해 자국이 필요로 하는 한국 영토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본의 독도 편입 시도로 동해에서의 러. 일 간 해전을 앞 둔 상황에서 독도의 군사적 가치를 고려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1904년 8월 ‘제 1차 한. 일 협약’을 통해 한국 정부에 일본인 등 외국인 고문을 임명하도록 강요하는 등 1910년 한국을 강제병합하기 이전에도 이미 단계적인 침탈을 진행했다.
독도는 이러한 일본의 한국 주권 침탈과정의 첫번째 희생물이었고 1905년 일본 독도 편입 시도는 오랜 기간에 걸쳐 확고한 확립된 영투주권을 침해한 불법행위로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
1943년 12월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에서 축출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고 1945년 7월 발표된 포츠담 선언도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연합국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는 1946년 1월 연랍국 최고 사령관 각서 제 677호 및 1946년 6월 연합국 최고 사령관 각서 베 1033호를 통해 독도를 일본의 통치, 행정 범위에서 제외한바 있다. 따라서 독도는 제2차 세계대전 중전 이후 독립한 대한민국의 불가분의 영토가 되었고 이는 1951년 샌츠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재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