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 있다 함은 생각을 한다는 것과도 상통하는 말이다.
생각은 살아 있는 사람의 표시 등 이기도 하지만 그 생각을 가려서 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삶의 난제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 생각이 “나” 라고도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생각의 부림에 휘둘리게 되면 정상적인 평범한 생활을 유지할수 없게 되는데 그때는 어떤 피신처를 찾게 된다. -편집자 주-
설정과 기대는 어떻게 할까?
무력함의 인정
우리가 살아가면서 설정과 기대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매일 즐겁기만 할까? 옛말에 “극락도 정토가 아니다”고 했다. 생각이란 거울에 사물에 있는 그대로 비춰지듯이 생각도 이런 생각 저런 생각 그냥 떠오르는 것일 뿐이다 거기서 우리는 좋고 나쁨을 구별하여 좋은 것은 오래 붙들어 두고 싶어하고 싫은 것은 아짤없이 버리려 한다.
그 구별 또한 내 생각일 뿐이다 그것이 언제까지 좋기만 하고 또 언제까지 나쁘기만 하겠는가? 그렇다고 좋은것만 취할수도 없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때 우리는 무력함 이라는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명 생각에는 나의 의지로는 잠깐 눌러놓는 일은 가능 할지 모르지만 무력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저렇게 대처를 하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적어도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받아 들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병을 앓고 있는 우리에겐 너무 넘기 힘든 큰 산이다.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솔직함과 정직함을 바탕으로 용기내어 그때의 생각이나 느낌 감정을 믿을 만한 어느 누구에게 쏟아 내 놓는 일이다.
이때 사용한 건전한 배출구의 역할은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 변화라는 것은 일단 가슴이 벙 뚫리는 숨쉬기가 훨씬 수월 해지고 불안감과 죄의식과 두려움이 한층 줄어 듦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배출구없이 살아가다 보면 “화”와 “한”이 축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 평소 때 일상의 평범한 생활 안에서 뭔지 모르게 불안하고 때로는 슬프기도 하며 두려움이 잦아 들때도 있다 내 삶에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살고 있으면서도 즐거움이 없다. 이때는 내가 생각의 의존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두 손을 드는 무력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화”와 “한”은 설정과 기대가 무너질때 좌절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다.
더러는 “난 화를 그냥 참는다” 그렇게 될때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 부분 눌러놓는 때이다 “화”는 눌러놓고 억누른다고 참아 지는건 아니다 그것을 억누르면 마음의 평온이 깨지고 흔히 두통이나 요통 그 밖의 육체의 취약한 부분에 적신호가 와서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화가 나면 건전한 배출구를 찾아 해소를 해야지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인정 하지 않고 숨기고 포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쌓아 놓기만한 화약고가 터질 때는 무서운 힘으로 폭발을 하게 된다.
건전한 배출구를 찾아 그 작업을 하게되면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하여 아주 조심스럽게 나를 다룰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나의 행동 나를, 나의 삶을 잘 대접할수 있을 때 상대방에게도 존중 할 수 있는 면을 찾아서 대접해줄 수 있는 마음이 허락될수 있다. 그리하여 상대가 누구든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침착하고 이성적인 대화에 응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질수 있고 그런 관계유지는 꺼리낌과 불편함이 없고 자존감과 자신감이 내 삶의 주역이 되어 살 수 있다.
생각이 존재하는 이 우주 공간에 복의 기운이 있다면 누군가가 그 흙탕물을 마시려는 용기있고 자애심으로 자신부터 진심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복을 퍼 부어 주려고 안달하는 그런 자유를 체험 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곡간에서 인심이 나 더이다” 이상은 알아넌 한인 고민 모임 방에서 나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