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그다지 풍부하지 않았던 1950년대의 시골 깡촌에서 태어나 날고 싶고 뛰고 싶기는 한데 눈앞에 보이는 세계는 삶이 그닥 신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았다. 용기도 여건도 허락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없는것” 그 결핍이 나를 거짓으로 포장하는 삶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어린 나이였음에도 삶에 대한 투쟁이 시작 되었던것 같다 눈을 뜨고 바라다본 세계는 전깃불도 없는 초가삼간 집안에는 항상 사람이 북적이고 식구는 많은데 집은 그리 큰 집이 아니었던것 같았다 .
해질 무렵이면 호야등에 석유를 채워 넣는일이 내가 해야할 일이었고 난 어쩜 그일이 그리도 하기 싫었던지…다른 아이들은 밖에서 고무줄 뛰기도 하고 깡통 차기도 하고 뛰어놀면서 소꼽놀이도 하는데 나만 집에서 그러고 있는것 같았다 .
동네에서 제일 부잣집 이라고 하는 내 친구집은 기왓집에 집안에 감나무가 여러그루 있었다 .동네에 같은 또래 친구가 여럿이 있었는데 모두가 잘 지내보였다
나만 빼고 그때도 난 뭔가를 비교하고 있고 없고가 눈에 들어 왔으며 소박한 시골 생활의 즐거움 보다는 “왜 이렇게 밖에는 살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이 더 많았던 복잡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러므로 인하여 부러움의 대상이 생기고 깡촌에서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시내 중학교를 진학하게 되고 거기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생활의 차이점이 드러나 보였다.
같은 도시로 학교에 간 친구도있는데 나만 그런 생각으로 편치 않게 사는것처럼 보였다 그 시절 큰 오빠가 국민학교 선생님 이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교대에 가서 선생님이 되고 싶은 꿈이 컸었다. 그 큰 오라버니는 학생들을 가르치다 군에 입대하는 날 군대에 보내는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보이길래 엄마에 대한 이별의 아쉬움으로 그러는가 물어 보았더니 그것도 있고 가르치던 학생들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이다
.그토록 그 오라버니는 평생을 천직이라 생각 하시고 교장선생님으로 은퇴 하시어 지난해에 83세로 세상을 뜨셨다. 7남매 중 막내로 자라면서 내가 제일 많이 그 오라버니를 닮았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다.
해질무렵 돌담길 골목에서 옆집 앞집 친구들 윤자 영조 부경이 만복이를 쪼롬이 줄 세워놓고 내가 읽은 동화책 줄거리 이야기 해주고 구구단도 외우고 가르치는 일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어린시절이 있었다. 시골에서 도시학교로 간 나는 공부 잘 하면 모든 일이 해결 될것 같아 60명 반원 중에서 1 2등도 해 보았지만 그런다고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은 답을 주지않았다.
성적과 등수는 내 욕심처럼 더 올라가지 않았고 한편 더 좋은 성적을 요구하는 여고를 가지 못하고 같은 학교를 별다른 기대없고 희망 없이 다니면서 항상 뭔가 모자라고 비워 보였던 내 모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누군가가 말했던가 복은 한꺼번에 둘이 오지 않고 화는 겹치기도 한다고 어느날 몸져누운 어머니가 4년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시다 돌아가시기 몇달전에 직장암이라는 병명을 알게되고 처절하게도 통증과 싸우시다 돌아가셨다.
나의 대학 진학은 흐지부지 되어버리면서 아니 시골살림에서 4년을 병원비 충당하는일이 만만치않았을 것이고 고래등 같은 기왓집 지어 이사했던 일도 있었고 시골 살림살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다 나 역시 대학의 필요성보다 엄마없이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절망감이 더 컸던것 같다.
그 4년의 시간은 먹구름의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었고 밖에 나가서는 집안 걱정에 맘 편한적이 없었다. 그 일의 연장선으로 참 슬프고 부끄러운 졸업식날이 생각 난다. 졸업하는날 아무도 졸업식에 온 사람이 없었다. 형편이 되지 않은 줄 알았기에 난 식구들에게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나의 존재는 “없는 사람” 같았다
졸업식날 누군가가 아무도 나를 축하해주러 오지 않은 것을 친구들에게 들킬까봐 교문 밖에 나가 꽃을 한 다발 사서 들고는 성급히 교문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은 얼마나 황망하고 부끄러웠든지…..
그때부터 난 “없는사람 “에서 “있는사람” “잘 하는 사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비교하고 경쟁 하면서 발버둥치고 소리없는 전쟁을 치르고 살아왔던것 같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만족은 없고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나를 보고 있는 그 답답함은 죽음의 늪지대라고도 말할 수있을만큼 비정했다.
지금도 앨범을 보고있노라면 씁쓰레한 웃음이 나온다. 뚜렷하게 내세울것 없는 부모와 형제들이라고 생각 했건만 난 지금 그분들보다 뭐가 더 나은게 있는가 반문해본다.
아무 대답을 못한다.
그때는 이루지 못할 이상이기에 모래탑만 더 높이 쌓아올려졌고 대학을 못 간 스스로가 만든 열등한 마음때문에 아무도 묻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일에 고등학교 졸업한 것이 무슨 죄라도 지은양 대학을 나왔다는 말도 못하지만 고등학교만 졸업했다는 소리는 더더욱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기에 삶에 자신이 없었고 나 스스로를 어디에다 저당 잡히고 살아가는 줄도 모르는채 뚜벅뚜벅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시간에선가 멈춰버린 성장의 줄기가 그때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연스런 변화도 받아들이지 못한채 결혼하고 아이 낳고 부부가 되고 엄마 아빠가 되는 일이 그냥 이어져 가는것 처럼 보였지만 어딘가에 어느 시점에서 걸려서 더 이상 진행이 않되는 그곳은 병들어 가고 있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이름하여 (Adult children) 성인자녀라고하는 사람들이다.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을 이런 변화로 채워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잠시 잠깐의 만족은 가능 할지는 몰라도 더 큰 댓가를 지불해야할 때도 있었다. 모자라기때문에 채워야했고 없으니까 있게하고 싶었다 과연 이런것들은 나의 생존의 중심에 무엇으로 작용하였던가?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나 ” 내가 있음을 내 존재 그것 만으로도 “없는 나”의 척박함에서 벗어날수 있는 아니 더 이상 있고 없고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 전개됨을 알고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음 보다 더 큰 소재가 있을까?
이 일도 내가 살아 있는 일의 표현이었다. 결국 보따리 짊어지고 이사를 좀 멀리 캐나다까지오게 되었다. 우리 모든 이민자들도 개척자들이다. 그러기에 그 개척자 이름 값 하니라고 많은일 겪었으리라 많은일 겪는 일 중에 예상치도 못했던 늦둥이가 태어나고 꼼짝없이 집안 일과 육아에만 메달려 있으면서 이래저래 머리 돌리고 궁리하다 신과의 거래도 해 봤다.
“이보시오 하느님! 일을 나갈수는 없소 그렇다고 남편혼자 벌어살기에는 가지고 온 돈 거의 다 바닥이요. 내가 일하러 가는 대신 집에서 아이들 셋 키우고 풀타임으로 기도 하겠으니 밥이든 빵이든 그 생계는 유지시켜 주시요.”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밥은 굶지 않고 살고 있다.
때때로 푸드뱅크에서 빵을 줏어다 먹을때도 있었지만…..
그리고 지금은 푸드뱅크에 다시 갖다 놓는 일도 하고있다.
그래도 사는 일은 끝까지 자유롭지 못하고 폭폭했다.
그래서 교통사고 후 보상금으로 또 한번의 개척자 정신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도보순례길에 올랐다. 40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차량이나 다른 운송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보통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그 늦둥이 14살 아들과 함께 960킬로미터를 완주했다.
그러면 이런 저런 일들이 행해진 뒤에 그 “없는것” “채워지지 않는 것”이 해결이 되었을가?
대답은 아니다 이다.
그것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모자라는것 채워지지 않는것 때문에 고통이었고 안타깝고 억울해서 분노하고 두려웠지만 그것때문에 살 수 있었다. 신께서는 그것으로 나에게는 건전한 배출구가 필요함을 알게해주셨고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없는것 채워지지 않는것 이마음은 없애고 다른 걸로 채워야한다는 그런 대상이 아니고 있어야하고 없애야한다는 마음 자체가 없어져 버리고 일 없는 사람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집 짓는자들의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