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끝없이 무엇인가를 붙들며 살아간다. 이름을 붙들고, 관계를 붙들고, 기억을 붙들고, 육신이라는 집을 붙든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인간은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 조용히 놓인다.
“과연 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누군가는 흙으로 돌아간다.
埋葬은 땅의 품으로 스며드는 방식이다. 조상들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한 줌의 몸이 서서히 검은 흙과 뒤섞여 이름 없는 미생물과 나무뿌리의 양분이 된다. 그 느리지만 겸허한 귀환 속에는 인간이 자연보다 크지 않다는 불변의 진리가 담겨 있다.
누군가는 불이 된다.
火葬은 육신을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바람으로 흩어 보내는 의식이다. 뜨거운 불꽃 속에서 한 생의 흔적은 재가 되고, 남겨진 이들은 작은 유골함 하나를 품에 안는다. 인간이 평생 쌓아 올린 것들이 마지막에는 손바닥 안의 무게로 남는다는 사실은 묘하게도 슬프고 아름답다.
또 누군가는 나무가 된다.
樹木葬은 죽음 이후에도 다시 잎을 틔우려는 인간의 소망처럼 보인다. 봄이면 연두색 새순이 올라오고, 여름이면 새들이 가지에 내려앉는다. 사랑하던 사람이 어느 날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바람 속에 서 있다는 상상은,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조금 덜 외롭게 만든다.
그리고 세상에는 風葬같은 방식도 있다. 육신을 자연 그대로의 시간 속에 내어 맡기는 일. 새와 바람과 햇빛이 인간의 마지막을 완성한다. 문명은 죽음을 감추려 하지만, 어떤 전통은 죽음을 자연의 거대한 순환 속에 다시 놓아둔다. 인간은 결국 자연이라는 단어의 한 구석, 한 획에 불과한 일부였음을 인정하듯이…
며칠 전, 캐나다인 지인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연인이 암 투병 중이고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녀가 생전에 가장 사랑하던 카약 위에 사진을 올려 먼바다로 띄워 보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사진 옆에는 오래 함께 살았던 반려견의 사진도 함께 코팅해 붙일 예정이라고 했다. 한동안 그 장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잔잔한 새벽 바다. 물안개가 희미하게 깔린 수면 위로 작은 카약 하나가 떠 있다. 사람도 노도 없는 그 배 위에는 한 여인의 웃는 얼굴과 늙은 개의 눈빛이 함께 남겨져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서로의 세계였던 둘이 마지막 길도 함께 가는 것이다.
지인은 카약 안쪽에 자신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적어둘 생각이라고도 했다. 혹시라도 먼 훗날 그 카약이 낯선 해안으로 떠밀려온다면, 발견한 사람이 연락을 주기를 바란다고, 그녀가 지금 어디쯤 도착해 있는지 알려달라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시 바다로 멀리 띄워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고 했다.
죽음을 이렇게까지 가볍고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또 한편 먹먹하였다. 무덤 하나 남기지 않고, 비석도 없이, 그저 바다의 움직임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일. 그것은 어쩌면 집착을 내려놓는 마지막 사랑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살아 있는 평생 동안 방향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간다. 학교, 직장, 가족과 공동체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좌표를 확인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누구도 정확한 지도를 갖고 있지 않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이 되는지, 다시 만나게 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각기 마지막 길을 상상한다. 흙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 한 줌 재가 되어 바람 속에 날아가고 싶은 사람, 나무가 되어 사계절을 견디고 싶은 사람, 혹은 이름 없는 바다의 숨결 속으로 끝없이 항해하고 싶은 사람… 어쩌면 죽음 이후의 세계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 끝내 놓지 못하는 사랑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 카약이 정말 먼 나라의 어느 해변에 닿게 될까? 그리고 낯선 누군가가 그 사진을 발견하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기도해줄까?
“아, 이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여행 중이구나.”
그 순간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고 있는 한 존재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생은 붙드는 일이지만, 죽음은 놓아 보내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품은 결국 자연이다. 죽음은 우리가 왔던 곳으로, 아주 오래전에 별과 바람과 파도였던 자리로, 조용히 돌아가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