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9 08:09:55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적막한 거실에서 나는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이 아른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모두 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덤덤하게 가라앉은 집 안 분위기에 나 역시 조금씩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늘 바빠 얼굴조차 마주하기 힘든 딸아이의 기척만이 간간이 그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그렇게 텅 비어 있던 고요한 공간에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딸아이의 결혼식을 앞두고 모두가...
2026-09-09 08:09:24
3월 31일 토요일당분간 현장에 잔류하면서 내가 지적한 시설의 보수·보완 작업을 관리할 사람들과 작별하고 오전 10시에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참사위원이 출국 수속을 아주 간단히 처리해 주었다. 이럴 때는 ‘빽’이 좋기는 좋다.북한을 빠져나오기 전, 정말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 있었다. 순안공항에도 명색이 국제공항인 만큼 면세점 몇 곳이 눈에 띄었다. 한 상점에 들어가 소위 북한의 명물인 ‘들쭉술’을 두 병 사려고 계산대에 올려놓았다.그러자 아리땁고 엷게 화장한 판매원...
2026-09-04 01:09:18
3월 30일 금요일 2연안을 지나 평산까지는 비포장도로이고, 평산부터는 전날 밤 내려올 때 이용했던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다. 연안–배천평야는 구획 정리가 잘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사리원평야는 더 넓다. 아주 먼 곳까지 구획 정리가 잘된 논이 보인다.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농지개혁이라는 구실 아래 구획 정리를 철저히 해놓았다. 이것은 농사를 기계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위면적당 소출량을 정해 구역마다 경쟁시키기 위한 것이다. 전원 풍경은 이른 봄이라서 그런지 아주 조용하다....
2026-09-02 14:09:21
아들이 살고 있는 오타와 강가, 잔잔하던 물결 위로 느닷없이 거센 물살이 일었다. 커다란 물고기들이 몸을 부딪치며 흙탕물을 일으키자, 강은 한순간에 요동쳤다. 나는 격랑 속에서 숨 가쁘게 흔들리는 생의 단면을 마주했다. 물에서 일어난 흔들림에 마음을 붙잡힌 채, 나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멈춰 서 있었다. 자연은 가끔 잊은 줄 알았던 감정을 다시 불러낸다. 흙탕물을 헤치며 꿈틀거리던 물고기의 몸짓이 오랜 시간 묻어둔 나를 끌어올렸다.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 썼던 날들, 지키고자...
2026-08-27 13:08:24
3월 28일 수요일아침 8시20분에 전기가 들어왔다 시동을 준비하는데 10시 10분쯤에 나간 이후로 하루 종일 무소식이다. 점심 후 우리에게 식사를 준비해주는 아주머니에게 고맙다고 몰래 미화 20불을 쥐어 주었다. 저녁때 나를 보더니 아주 고맙다고 남 몰래 눈 인사를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여인은 상업학교를 나와 평양 민경련 사무실에서 경리를 보는데 이번 시운전 기간 현장 시운전 팀 조리 담당으로 차출되었단다. 본부 경리과에서 졸지에 지사 경리도 아니고 취사담당으로...
2026-08-27 13:08:21
마른 하늘에비가 내린다 하늘은 맑은 데한가운데 텅 빈 동그라미 모양 너의 자리가 덩그렇다 아무것도 적시지 않고 오직 한 가운데몸에 닿을까애써 오무리며 한 글을 쓴다 비가 아닌 것 같은비가 내린다 비밀이 많은 따옴표, 바로 한 가운데 아무 것도다치지 않게 하려는애 쓴 흔적 오직 한 줄이 내린다 많이 내릴 줄 모르는 너는 곧 그칠까바 너는 뚜둑 뚝 뚝 하다가잠시 생각에 잠긴 지난한 길위에동그라미 성하게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