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1 14:10:35
나무들의 검은 행렬까맣게 불타 버린 검은 나무 전쟁에 지친 몸으로 고향에 돌아온상처투성이 된 군인들의 웅장한 행렬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집요한 불길이 까맣게 자국을 남겼지 타 들어간 자리 바람이 불어 간 자리바람이 가을을 불러온 자리 땅에 떨어진곳곳에 남겨진 아슬한 생명이 숨을 쉬며 파랗게 살아났지 그 중에 다시 만난 풀잎들이사랑으로 얽히었지 검은 나무의 검은 행렬이슬픔을 이기고 자리를 지키며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지 어느덧 어둠이 짙어 지면더 견디리라 다시 견디리라 드라이브를...
2026-09-24 10:09:00
어제 평소 나를 아버지처럼 챙기는 아들 같은 사람이 찾아왔다. 나의 환갑잔치를 차려주었고 나의 노후를 걱정하는 친구의 아들이다. 그는 요즘 두어해 동안 부부사이가 좋지 않아 지난 달 음식점에서 만나 식사를 했을 때도 자신의 답답한 일을 털어놓아 마음이 아팠었는데 그때, ‘말하고 싶으나 어디 마땅한 사람이 없을 때 찾아오라’고 했었다. 아마 그 말을 기화로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무겁고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가 어드바이스를 원하면...
2026-09-24 09:09:20
식구들이 여름휴가를 떠났다 자리다툼을 하던 신발들도주인에게 끌려현관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여행 가방에밥 냄새와 빨래와몇 가지 의무를슬쩍 밀어 넣었다 이제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식탁 위의 고요는먼지를 핥으며 자라고 한낮의 햇살이소파 위에서게으른 고양이처럼 몸을 늘인다 내 안에 방 하나 비워진 오후문득한 채의 빈집이 되고 싶다 햇살이 푸르게 자라고 바람의 메아리가머물다 가는 집....
2026-09-17 02:09:04
가을은 왜 이렇게 투명 한가 멀어야 보이는 것 멀리 있어야 보이는 것 가까이 가면 사라지는 것 사뿐 앉았다 이내 사라지는 새벽 이슬 보려고 하지 말라 안 보아도 이미 여기 앉아 있고 잘 보이려고 하지 말라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넌 투명하다 잘 하려고 하지 말라 잘 안 하려고 해도 이미 넌 완전한 가을 이다 멀어야 보이는 가을은 그래야 더욱 잘 보인다 팔등에 부드럽게 앉은 바람은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네 마음을 다 아는 양 소소한 바람 너에게 뿌리고 멀어 간다...
2026-09-17 02:09:28
“ 베이비 컴잉 쑨!”또렷이 아이스크림 케이크 위에 써진 글자가 보였다. 딸 부부가 새해맞이 가족 모임을 주선했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한 식당 자리였는데, 오랫동안 기다려온 임신 소식을 분명히 발표하는 서프라이즈 식사였던 것이다. 결혼 후, 오 년 동안 아기 소식이 없었던 딸을 바라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 한구석 남아 있었다. 아마 근심의 그림자는 자신이 만든 조바심에서 생긴 그늘이었을지도 모른다. 생명이 찾아오는 길은 인간의 계획이나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익히...
2026-09-09 08:09:55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적막한 거실에서 나는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이 아른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모두 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덤덤하게 가라앉은 집 안 분위기에 나 역시 조금씩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늘 바빠 얼굴조차 마주하기 힘든 딸아이의 기척만이 간간이 그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그렇게 텅 비어 있던 고요한 공간에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딸아이의 결혼식을 앞두고 모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