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비 컴잉 쑨!”
또렷이 아이스크림 케이크 위에 써진 글자가 보였다. 딸 부부가 새해맞이 가족 모임을 주선했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한 식당 자리였는데, 오랫동안 기다려온 임신 소식을 분명히 발표하는 서프라이즈 식사였던 것이다. 결혼 후, 오 년 동안 아기 소식이 없었던 딸을 바라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 한구석 남아 있었다. 아마 근심의 그림자는 자신이 만든 조바심에서 생긴 그늘이었을지도 모른다. 생명이 찾아오는 길은 인간의 계획이나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익히 보아왔다. 하늘이 허락하는 시간의 빛이 비쳐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신비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식구 모두는 경사스러운 새해 첫 소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주관자의 손길을 타고 창조주가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이제 임신 삼 개월이 지났어요.”
사돈댁도 아기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차에 얼마나 반가운 순간이었는가! 보통 차세대 커플들이 첫 임신을 가족에게 알리는 공식적인 순서인데, 일체 비공개로 했다가 삼 개월이 지나 안전하게 임신이 확인되면, 이렇게 서프라이즈 발표식을 가진다고 한다. 딸에겐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맞벌이하는 신혼 커플은 아기 계획을 세운 지 삼 년이 지나도록 무소식이었다. 어떤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지 부부가 신중하게 검진을 가졌다. 그러는 중에 딸에게 자궁 근종이 있다는 뜻밖의 진단을 받았다. 더욱 임신 조건이 어려워졌지만 부부와 가족들은 열심히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다행히 전문의를 만나 근종 제거 치료를 잘 마치게 됐다. 하지만 또다시 반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딸은 이 십 대 중반에 짝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작정할 때, 공교롭게도 팬데믹 확산으로 몇 년을 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이 삼십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가까스로 동갑내기 커플은 코비드가 거진 사라질 무렵, 소수의 모임이 허용되는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비록 소박한 웨딩이었지만, 양가의 결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합의에 이른 것이다. 출발부터가 좁은 길이었고 평탄치가 않았다. 더욱이 한 해 후에 결혼한 시누이는 벌써 아들과 딸을 순산하여 키우고 있는 실정이었다.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뚜렷이 비교되는 모습이 여간 위축되어 보이지 않았다.
이 기쁨의 순간은 그동안 애절하게 기다려왔던 인고의 시간에 따라 비례하는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딸에게 속삭였다. 어려운 과정을 힘들게 이겨내고 얻어지는 결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낄 거야. 우선 자기와 가까운 모든 것에 감사가 일어나고 먼저 내가 새로워질 거야.
“그리고 딸아! 이제부터가 시작이다”라고
봄의 생동감이 어느 해보다 파도처럼 몰려왔다. 온통 피어나는 봄철의 생명들이 태중의 아기와 함께 환희로 약동하는 계절이 빠르게 흘러갔다. 만삭이 가까워 오면서 여름의 폭양이 절정에 이르러 산모는 무더위로 퉁퉁 부운 몸을 견뎌내는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출산 예정 한 달을 앞두고 딸 친구들은 모여서 ‘베이비 샤워’를 마련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귀어온 친구들이었다. 여름휴가 차, 하와이 여행 중에 생긴 아기라고 이 날의 주제를 ‘알로아 베비’라는 제목을 파티장에 붙였다. 여러 음식과 선물을 펼치면서 태어날 아기를 위해 필요한 선물을 주는 모습들이 무척 바람직하고 활기가 넘쳐 보였다.
오늘날 삼십 대 중반을 넘긴 여성 중에 자궁 근종 발생률은 10명 중 4~5명 꼴이라고 한다. 그만큼 임신의 사정이 지연된다는 형편도 알았다. 의술의 발달로 가급적 부모가 건강고 안전한 아기를 출산코자 하는 선택으로 종종 I.V.F(체외 수정)를 권장한다고 들었다. 딸 부부는 직장 혜택이 주어져 I.V.F를 시도했다. 마침내 출산일이 가까웠다. 아침 일찍 분만실에서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오 년 만의 만남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행진곡과도 같은 것일까. 탄생의 순간은 얼마나 귀중한 의미를 안겨주는지, 분만의 진통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다음날 산후조리 미역국과 하얀 쌀밥을 정성껏 준비해 산모실을 방문했다. 해산 후, 부부가 원한 별미 음식이 김치전이어서 특이한 기억으로 남았다.
태명을 예은(예수님의 은혜)이라 불러왔듯이 아기와 만나는 첫 순간은 오 년의 길고 긴 노년의 노을빛을 걷어내고 찬란히 빛나는 아침 햇살처럼 눈부셨다. 예은이가 우리를 찾아옴으로 가족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온갖 산고를 극복한 산모는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모든 정성으로 보살핀 남편은 늠름한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양가 부모는 더 이상 한 자리에만 머무르는 노인이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살면서 받게 되는 많은 이름 중에서 으뜸가는 금메달 별칭을 받은 것이다.
“예은이는 앞으로 우리 가족을 비춰주는 행복과 사랑의 샛별이 될 것이야.”
우리는 절대자로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막힌 선물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보호해 주신 전능자께 깊은 감사를 올려야 한다. 가족 모두의 간절한 기도로 예은이를 맞이했다면 앞으로도 우리 아기를 위해 주어진 역할을 힘써 지켜나가야 하리라. 보이지 않았던 자궁 속 아기가 확실히 우리에게 나타났듯이 한 마음으로 키워가기를 다짐하는 자각이 일었다.
오 년 걸린 만남으로 인해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질서와 위치를 먼저 이루어 감을 알게 했다. 생명의 비밀을 세밀히 말해주는 사랑의 순간이 밀려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