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재 마을 형제들 / 양한석

2026-05-13 13:48:04

오랜만에 이루어진 모국 방문이었다. 절친의 배려로 가고 싶은 곳을 고르라고 하여 서슴없이 서울 근교에 있는 남양주의 팔당호를 가보자고 했다. 그곳엔 두 강물이 합쳐져 이루어진 두물머리가 있어 한 여름의 더위를 식혀줄 시원스러운 강물이 넘실거렸고 무엇보다 ‘다산 유적지’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업적은 익히 알려져 온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저술가이다. 그의 ‘목민심서’는 학문적 사상을 대표하는 책자로 유명하다. 그동안 친구와 못 나눈 우정을 나누며 유적지 전경을 둘러보았다. 비교적 경내는 널찍했고 최근에 세운 한옥식 건물이라 모든 시설물이 깔끔하고 산뜻했다. 문화관에서 그가 그렸다는 문인화풍의 ‘열상산수도’를 보는 순간 빼어난 수묵화의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를 학자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 당시 사대부 학자들의 자격 요소로써 시와 글뿐만 아니라 그림에서도 능통해야 함을 실감케 했다. 당대 학자들의 인품이 이토록 고상하였던가 싶으면서 오늘날 전문적인 학문과 차이를 느끼게 했다. 갇혀있던 유배지에서 온갖 역경과 고초를 이겨내며 꽃 피운 학문의 열정과 그 원동력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궁금하게 했다.

다산은 18년의 강진 유배를 마치고 그의 생가로 돌아와 여러 정적들의 음해를 조심하려는 뜻으로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집 이름을 지었다. 18년 유배를 겪은 학자로서 언행을 항상 경계하고 신중하게 처신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현판을 걸었다. 그가 그린 산수화에서도 이런 상황을 담아 가며 그렸다고 전해 온다. 박물관으로 옮겨가 여러 가지 유품과 그가 독창적으로 설계한 도구들을 볼 수 있었다. 아내 홍혜완이 애절한 그리움을 담아 보내준 주홍빛 비단천 하피(霞帔)가 보였다. 아비로서 두 아들에게 당부하는 간곡한 가르침과 아내를 향한 애틋한 사랑을 비단 조각 위에 표현하여 서신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하피첩에 새겨진 아버지의 마음이 노을빛에 물든 유언처럼 뭉클하게 다가왔다.

한 때, 친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민 생활을 했었는데, 그만 간질환이 발병하여 모든 이민의 성공을 뒤로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아내의 지극한 간호를 받고 크리스천으로 거듭난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었다. 기적적인 투병 담을 들으며 약속이나 한 듯이 친구와 나는 차츰 발걸음이 마재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다산 유적지 여러 곳을 조목조목 둘러본 후, 팔당 호반을 끼고 이어지는 다산길로 들어섰다. 풍족한 물이 넘실거리는 팔당호를 바라보며 소내 나루 전망대를 걸어가는 호젓한 둘레길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었을까. 그날의 그 시각은 영원히 간직될 추억의 명장면만 같았다. 더욱 이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말미암아 그가 태어나고 성장했던 마을길이 다산길이 되어 오늘날 빼어난 이 지역의 생태공원을 이루었다고 짐작하게 했다. 팔당호를 따라 얼마동안 걸으니 마재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다산의 네 형제들 약현, 약전, 약종, 약횡이 성장한 고향이었다. 이곳에서 천주교 순교 성지로 조성된 가옥과 정원을 만났다. 특별히 온 가족이 순교한 정약종의 유일한 기념관처럼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마재 마을 삼 형제 약전, 약용, 약종은 모두 천주교에 입교한 상태여서 조정의 극심한 탄압을 피할 길이 없었다. 혹독한 신유박해가 감행된 것이다. 형제가 모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셋째인 약종만이 끝까지 순교하여 온 가족이 거룩한 믿음의 성가정을 드러내는 오늘날 믿음의 표상이 되었다. 그 현장의 모습을 여러 가지 조형물로 재현해 놓아 마재 성지를 직감하기에 충분했다. 친구와 나는 잠시 숙연한 분위기를 가졌다. 그리고 다산의 마재 마을 형제들을 다시금 짚어보게 했다. 민중을 깊이 사랑한 학문적 경지에서 기필코 살아남아 형제 약종이 뿌린 순교의 피를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는 피눈물 나는 결단이 새워졌다. 어떤 악조건이 닥치더라도 극복하여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 나라를 민중에게 전하리라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굳은 결의로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각각 귀양길에 올랐다. 유난히 두 형제는 학문을 완성하려는 뜻이 일치했는지 형제 사이에 우애가 아주 각별했다고 전해온다. 조선의 최남단에 유배된 그들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면서 나눈 애틋한 형제애를 주고받은 그들의 서신으로 잘 알 수 있다.

정약용은 강진에 다산 초당을 마련해 18년간 여러 제자를 기르며 많은 저술과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유배가 풀리어 조정에 돌아와 벼슬도 유지했다. 다시 18년간 고향인 여유당 시절을 보내면서 오늘날 조선의 대학자의 유업을 남기게 되었다. 반면에 그의 형 약전은 흑산도에서 14년간 머물며 자산어보를 완성하고 끝내 그 섬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산은 과학적인 분야에서도 실험과 실용을 중시하여 의학, 기술, 건축 도구 등 다방면으로 재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친구와 마재 마을을 나오면서 처음 다산 유적지에서 마주친 ‘열상산수도’의 시를 떠올려 보았다.

소소하게 구름 낀 숲에 험준한 바위가 열리니
아마도 하늘 높은 바람이 이곳에 왔겠지
풀 언덕 작은 정자는 누가 지었나
폭포수 샘소리 두산에서 들려오네

얼마 후, 나는 한 편의 영화를 감상했는데 제목이 ‘자산어보’였다.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인 구성이었지만 영상으로 실감 나게 재현되는 시대적 아픔과 마재 마을 형제들의 비극적 수난이 깊이 있게 다가왔다. 정약종의 순교 장면은 조선에 기독교가 태동되는 중요한 사건이자 이로 인한 형제들의 학문적 완성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게 했다. 기독교 사랑의 메시지가 조선의 봉건적 관료 구조와 마주치며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계급의 부패와 신분적 차별에 충돌하여 얼마나 급진적인 변혁을 일으켜 갔는지 생생히 알 수 있었다. 형제들은 무엇이 보다 실질적인 민생을 살찌우고 윤택한 행복을 추구한 학문이었는지를 대조하며 보여준다. 다산의 목민심서의 길과 약전의 자산어보의 길을 나누어 보여주면서 한층 뚜렷한 실학의 모습을 부각했다.

이민 시절, 심각한 병고의 위기를 신앙으로 극복했던 친구와의 동행으로 마재 마을을 방문한 것은 우연이 아닌 색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보다 상세히 다산의 형제들을 살펴보게 되었고 한 편의 영화로 구체적인 약전의 생물학적인 탐구심과 민중을 차별 없이 사랑한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더욱 깊은 감명으로 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