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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의 길, 김지한 사장(1)

2024-01-17 10:42:25

캐나다에 이민가면 뭐 해 먹고 살지?
관광여행이 아니고, 살기 위해 캐나다에 오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산 좋고, 물 좋고, 날씨 좋은 밴쿠버. 그 밀월의 시간은 잠시.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돈은 대소쿠리에 물 새듯 하고, 한국에서 제법 했다던 영어도 밴쿠버에서는 무용지물. 결국은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할 질문에 그저 ‘예’로만 일관하다 사기꾼에게 싱싱한 날것으로 가진 돈 바치는 일이 비일비재해지면 어느덧 청운의 꿈은 날아가고, 고향생각에 한숨만 짓게 되는 이민 초기.
그러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낯선 땅에서는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두 팔, 두 발 걷어 부치고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야 한다. 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이민자의 사는 법’이다.
캐나다는 1960년대 중반까지 주로 목사, 의사, 학자들이 선교사 또는 유학생 등으로 와서 정착한 한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1963년 한국과 캐나다간 외교관계가 수립되면서 ‘이민자’신분으로 서의 한인들이 캐나다로 대거 유입되었다.
한인들의 캐나다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5년 가을에 반도호텔에 캐나다 이민관이 나와서 이민 희망자들로부터 신청서를 받은 후의 일이었다. 그때 한국에서는 이민 붐이 일어서 캐나다의 이민관이 내주는 매달 200장의 신청서가 2시간도 안 가서 동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자료 출처: 재외동포재단 웹진 재외동포의 창 2014년 2월호).
밴쿠버도 이민자의 증가로 최초의 교회인 밴쿠버 한인 연합교회가 1966년 3월 6일 설립되었으며, 동 교회는 ‘한인회’와 ‘한글학교’, ‘한인 노인회’를 창립하는데 주역할을 담당하는 등 밴쿠버 한인 초기 이민역사 그 자체였다.
밴쿠버 초기 이민자 중 많은 사람들이 연합교회를 거쳐 왔으며, 그들은 밴쿠버 한인사회의 든든한 초석을 다지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밴쿠버에서 최초로 한인 잡화상점(그로서리)을 개업한 김지한 사장이다. 현재는 은퇴하였으나, 한인신협이사로 여전히 활발하게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김지한씨가 밴쿠버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68년 1월 12일. 그가 만 스물일곱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그는 토론토로 가려고 했다.
그가 한국에서 출발 전 유일하게 알고 있던 캐나다 도시가 토론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심사를 받기 위해 잠시 내린 밴쿠버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버렸다. 물론 밴쿠버에서 또 서너 시간 비행기를 더 타고 가야 한다는 것도 피곤하던 참이었다.
사람 사는 곳이 대개 그렇듯,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서 살면 사람대접 받기 힘들다. 다행히 이민초기에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넓은 땅을 가진 캐나다가 인력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이민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이민자들을 위해 무료 영어교실(ESL)을 제공하면서 취업하기 전까지 생활비도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이민자가 한 해 50만명씩 증가하니까 차츰 복지후생이 줄어드는 현재를 생각하면 금석지감이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만 바라보며 살 수 없는 법. 그는 튼튼한 청년의 몸과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었다. 일본인 식품 도매상에서의 배달 일이었다. 한국인 특유의 성실과 근면함으로 무장한 그는 남보다 앞서기 위해 일찍 출근하게 늦게 퇴근하는 선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각 소매점과 일반가정에까지 식료품을 배달하면서 항상 웃는 얼굴로 고객들을 상대하였다. 부지런하고 친절한 그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그는 장차 한국교민들이 증가할 것으로 생각하여, 한국식품점을 열 꿈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얼마 되지 않는 한국교민들이 중국이나 일본식품점에서 먹거리를 사던 때였다.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라, 한국인들을 위해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세상 어디에 가도 한국인의 입맛은 바뀔 수 없는 법. 배달일로 고객은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 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도매상이 동양식품을 어디에서 공급받는 지를 꼼꼼하게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식재료를 어디에 주문해야 할 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공급망과 수요망을 확보한 그는 드디어 1970년 밴쿠버 메인가와 16번가가 교차하는 지점 부근에 ‘새마을 식품점’이라는 한인 식품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한인 숫자도 많지 않고, 요즘처럼 다양한 홍보수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계획이 다 있었다. 일본도매상 배달일을 그만두고, 캐나다 우유회사 배달업무를 하였는데, 제법 괜찮은 월급과 각종 복지혜택도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2년간 사귀었던 약혼녀 김수씨를 밴쿠버로 초청했고, 그녀는 운 좋게도 UBC에서 직원 보조업무를 하던 한인유학생부부로부터 업무승계를 할 수 있어, 남편을 내조할 수 있었다.

가게를 열었어도 안정적인 생계를 위해 우유배달일을 계속했다. 새벽 6시에 시작해서 오후 1시 30분경에 배달일을 끝내곤 다시 가게 일을 봤다. 그동안은 그의 아내가 남편이 올 때까지 가게를 운영하였다.
그때는 젊었으니까 가능했지요. 온 힘을 다해 열중하면 무슨 일이든 불가능이 없다고 확신했던 때니까요. 김지한 사장은 그렇게 그 때를 회상했다.
그는 또한 사람 들과의 만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밴쿠버 연합교회에 열심히 참석했을 뿐 아니라, 친목도모를 위한 야유회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첫째, 한국사람들이 서로 모여야 향수를 달래고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타향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땅에 일찍 온 사람으로서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무슨 도움을 줄 것인가를 사람 들과의 교류를 통해 차츰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