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의 중요성은 한국이나 캐나다나 다르지 않다. 지금은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 올 때 미리 집을 구입하고 오는 사람도 더러 있다지만, 한국인들의 이민 초기에는 언감생심이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올 수 있는 돈도 몇 백 불에 불과했고, 또 캐나다에 집을 장만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이민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연히 이민자들에게는 세금처럼 매달 지급해야 하는 월세가 큰 경제적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도 그랬다. 20여년전 밴쿠버로 올 때는 어디에 집을 사야 할 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이민답사를 왔을 때 만난 모든 이들이 처음 1년 정도 월세 살면서 우선 어느 지역에 살 지 결정하고, 집을 구매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래서 한 1년을 버나비 지역에서 월세 살았는데, 매달 나가는 월세 지출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러다 서울 집을 팔고 같은 버나비에 콘도를 구입했는데, 마치 일제 식민지 시대를 벗어난 해방감을 맛보게 되었다.
김지한 사장도 그랬다. 내 집 마련 꿈이 우선이었다. 이민초기에 버나비 홀덤 부근에서 월세를 살면서 밴쿠버 메인가에 있는 가게(새마을 식품점)를 가려면 버스를 세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그래서 그는 가게와 가까운 밴쿠버에 내 집 마련을 하면서 정착에서 오는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다. 다운페이를 하고, 주택담보 장기대출(모기지론)을 받아서 구입한 집이었지만, 타국에서 고정적인 보금자리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더구나 그 집이 1년만에 두배로 가격이 올랐다. 김사장은 이제 좀 더 넓은 공간으로 옮겨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해서 상대적으로 토지가격이 저렴한 리치먼드에 땅을 사고, 자기 만의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내가 설계하고 구상한 집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내 고단한 삶에 무한한 활력을 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지 매일매일 틈날 때마다 새 집건축현장을 들러 보았지요.
기초가 만들어지고 골격이 서고 지붕이 올라갈 때 마다 내 꿈, 아니 우리 가족의 꿈은 마냥 부풀어 올랐지요.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들 중의 한 때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김사장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해진다고 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고생과 노력이 보상받는 순간이었을 터이니. 그리고는 남들도 행복해지는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민자의 삶. 가장만이 힘든 것은 아니다. 부인인 김 수 씨도 힘들었다. 아이 둘을 돌보랴, 가게 일하랴, 이민자의 전형적인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 수 씨는 힘든 것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젊기도 했지만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꿈은 밴쿠버 오기 전부터 한껏 부풀어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한국인들이 캐나다라는 나라를 잘 몰랐고, 그저 미국에 인접해 있으니 같은 문화권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을 터. 그리고 우리 세대가 가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지식은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본 것이 전부이지 않았던가.
그녀는 영화에서 처럼 밴쿠버에 가면 매일 이웃들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즐길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시댁에서 예비 새색시에게 준 옷감으로 모두 파티복을 만들었다. 그리고 집에 자기만의 화실을 만들어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부부가 모두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 마주쳤다.
그나마 새마을 식품점을 운영함으로써 시급을 받는 종업원에서 운영자가 되었다는 것은 낯선 이국 땅에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 꿈이 이민생활에서 오는 외로움과 피곤함을 덜어주었다.
행복한 순간이 사람들에게는 여러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겠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친지들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당시 한국 이민자들이 편안하게 한국음식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이 없었다.
한국식당이 있어서 한국사람들이 함께 식사하면 고국에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니 잠시나마 향수를 달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지한 사장은 1975년 밴쿠버 이스트 헤이스팅스 715번지에 ‘뉴서울 식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최초의 한국식당을 개업하게 된다.
좋은 사람 들과의 만남. 김사장은 무엇보다도 이를 삶의 목표로 삼았다. 뉴서울 식당을 개업하여 한국교민들이 돈독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 것이 그래서 흐뭇했다. 그는 이민 초창기에 연합교회에서 만난 여덟 가족과 아직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죽고 못 살 정도로 친했던 사람들이 사소한 일 하나로 얼굴 붉히면서 원수가 되기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교민사회.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좋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서로 남을 비방하지 않을 것,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이나 대화소재를 나눌 것. 이것이 그들의 오랜 우정의 비결이었다.
그리고 인성(人性).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좋은 인성을 가진 좋은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