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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은 참전용사들을 기억합니다

2021-06-23 11:57:40

가이블랙 씨는 지난 20여년간 한국전쟁관련 행사 및 캠페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으며 200여명이 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명단을 새롭게 발굴한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다.

6월 25일 금요일, 버나비 센트럴 파크의 한국 전쟁 평화 대사 기념관에는 로워 메인 랜드 한인 커뮤니티의 고위 인사, 참전 용사 및 다양한 단체의 회원들이 기념식을 거행한다. 

그들은 71년 전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전쟁을 엄숙하게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에 감사를 드렸다. 그 날은 북한이 대규모 침공을 시작한 날로 일요일 오전 4시 선전 포고를 하자 아침 고요한 땅이 폭발했었다.

NPA 병사들은 소련이 만든 소총과 기관총을 T-34 탱크와 함께 들고 국경을 가로 질러 습격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붉은 깃발 아래 남북한을 통일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남쪽으로 침공했다. 그 당시 남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의 점령에서 벗어나 독립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3년 동안 지속될 잔인한 전쟁에 던져졌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까지 한반도 전투는 썰물과 밀물처럼 바뀌었다. 남한군은 부산으로 꾸준히 밀려왔고 이곳에서 ‘부산 경계선’은 북한군을 막는 마지막 방어선이 되었다.  전쟁은 한국군이 패배를 앞두고 종식을 앞두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항에 군대를 상륙시켰을 때 상황은 역전되었다.  

맥아더의 해상 침공은 북한군을 후퇴시켰다. 남한군과 유엔군은 38 선을 넘어 적을 쫓아 내고 중국과의 국경까지 돌진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바뀌기 전에 끝날 것 같던 전쟁은 중국 인민 군이 공격으로 긴 3년 전쟁이 되었다.  

중국군의 공격, 서울의 상실과 탈환, 그리고 가평 강 계곡 기슭에 있는 677 고지를 점령 한 캐나다 경보병 700명과 같은 전투원들의 결의를 시험하는 잔인한 전투가 치러졌다. 1951년 11월에 리틀 지브롤터로 알려진 언덕에 있는 프랑스-캐나다 왕립 22 연대의 스탠드 지휘관은“반두”에게“철수 금지, 소대 전복 금지, 패닉 금지”라고 지시했었다.  그들은 명령에 순종했고, 왕실 22 연대의 병사들은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했다. 

결국 한반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이 평화는 3백만 명의 사망에 대한 댓가였다.  22만7천800 명의 남한 군인과 약 70만 명의 북한과 중국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유엔 파견대에 속한 군인들의 희생도 있었다.  전쟁에 대한 미국의 기여는 결코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최소한 한국에서 사망 한 미국인 수는 상상할 수 없는 36천914 명으로 추정된다.  

6월 25일 갑자기 시작된 전쟁은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온 캐네디언 중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 그들의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캐나다는 부산의 유엔 기념 묘지와 일본의 요코하마 전쟁 묘지에 억류된 516명의 캐네디언들을 잃었고 일부는 BC 주에서 온 8명을 포함하여 캐나다에 묻혔다. 

 BC주민 중 한 명은 노스 밴쿠버에서 부모님, 동생과 함께 살았던 도널드 퍼킨스 헤이스팅스 상병이었다. 2 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도널드는 캐나다 경보병에 입대하여 대대가 주둔 한 앨버타로 파견되었다.  헤이스팅스가 제 2 대대와 함께 한국으로 떠났을 때 그는 아내 엘시와 딸을 캐나다에 남겨 둔 상태였다.  

1952년 10월, 툼 스톤 리지 (Tombstone Ridge)라는 장소 근처에서 야간 순찰을 하는 동안 그의 군대는 매복 공격을 받았다.  헤이스팅 상병은 즉시 부상을 입었고 의식을 잃었다. 순찰 대장 Sargent Richardson이 헤이스팅스를 태우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적의 수류탄이 갑자기 폭발하여 두 사람 모두 금속 파편에 맞고 땅에 쓰러졌다. 헤이스팅스는 포탄 분화구에 배치되었고 부상당한 상사는 아군 라인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캐네디언들은 매복을 당한 곳으로 와 헤이스팅스는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한국 전쟁에서 사망 한 BC주 출신 군인3명 중 한 명으로 시체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나머지 두 사람은 빅토리아 출신의 Able Seamen Vince Liska로 1950년 12월 4일에 진남포 항에서 바다로 대피하는 동안 배 밖으로 떨어졌고 또 John Nicholas Burak 군인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사망했다. 

71년이란 세월이 지난 오늘날 참전용사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밴쿠버총영사관과 한인사회 및 재향군인협회는 여전히 참전용사들을 기억하고 희생에 감사하고 있다.  

 

글 | Guy Black 
Coquitlam resident
Recipient
Minister of Veterans Affairs Commendation
Sovereign’s Medal for Volunteers and Medal of Civil Merit (Republic of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