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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의 정원 문학회

2024-08-08 11:41:14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는 이맘때쯤 정원문학회 또는 호수문학회의 이름을 붙여 야유회를 갖는다. 올해는 삼십 여명의 문우들이 그 배우자와 자녀들을 동반하여 랭리 소재의 갈멜산 기도원 너른 마당에 함께 모였다.
유난히 더디게 다가온 올해 여름, 7월 20일 토요일 태양이 머리 위 한가운데 짱짱하게 떠 있었다. 오랜만에 격조한 사이를 허무는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첫 순서로 정원 백일장을 알리는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 2024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형만 수필가가 부친의 방짜유기 작품인 징을 가져와 울렸다. 부친은 이봉주 중요무형문화재 77호 유기장으로 방짜유기 징은 한국에서도 쉽게 만나기 어려운 구리 황금색 농부의 얼굴이었고, 그 소리는 그윽했다.
문인협회 야유회의 백미인 ‘백일장’은 회원들이 평소 연마한 문장 실력을 진검 승부하는 자리다. 백일장 시제는 기도원장인 박명숙 수필가가 비밀에 부쳐두었다가 시제를 적은 두루말이 족자를 주르룩 펴서 발표했다. 시제는 “들꽃”, 짧은 시간 안에 순발력과 기지를 발휘해야 하기에 회원들은 즉시 각 자리에서 시작에 열중했다. 반 시간 남짓, 삼십여 명의 문우들은 각자 일상에 녹아있던 감성과 은유를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나름의 “야생화”를 담은 시들을 제출하기 시작했다.
응모작은 건물의 외벽에 게시되었고, 회원 모두가 심사에 참여하였다. 모든 작품을 살핀 후에 가장 마음에 와닿는 글에 한 표를 던지는 방식이었다. 표를 많이 받는 순서대로 장원, 차상, 차하 세 작품을 선정하였다.
한낮의 태양보다 더 뜨거웠던 시름의 시간을 마치고 기도원 주변으로 산책을 하면서 만발한 들꽃을 구경하면서 돌틈과 나뭇가지 위, 길섶과 모퉁이 뒤에 숨겨진 보물찾기 쪽지를 찾았다. 하나같이 오랜만에 해보는 추억의 놀이라서인지 보물을 찾은 이들의 아이 같은 환호가 여기 저기에서 들려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전직 주방장의 솜씨를 한껏 뽐내는 양한석 수필가가 정성껏 준비한 매운 돼지불고기와 함께 한국인의 야유회 밥상에 빠지지 않는 삼겹살, 모듬쌈과 미역냉국이 차려졌고, 구수한 부추전이 주방에서 즉석에서 부쳐져 나왔다. 아름다운 기도원 정원의 한켠 수십 년 된 체리 나무 그늘에 놓인 식탁에 둘러 앉으며 식도락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풍성한 만찬에 이어 김난호 수필가가 양식 전문가의 솜씨로 과일 담음새를 완성하여 선보였고 모두는 감탄했다.
식사 후 이어진 순서도 다채로웠다. 김보배아이 수필가의 맨손 체조는 일상으로 긴장했던 몸을 풀고 숲속의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순서였다. 아보츠포드 교육청에서 한인 청소년 담당자로 근무하는 윤미숙 시인이 수십 가지 놀이를 예능프로그램의 사회자처럼 진행했다. 몸으로 속담을 설명하여 맞추게 하고, 네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한 음절씩을 외치면 단어를 추측해 내야 했다. 특히 안 좋은 사이였다면 좋아질 법한 부부 게임은 보는 이들이 간지럼을 탈만큼 익살맞았다. 추억의 소풍날 게임인 밀가루 속 사탕 찾기 후에는 박장대소가 만발했고, 림보 경기에 참여한 아이들은 엄청난 유연성을 뽐내며 즐거워했다.
한편 포트무디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기도 한 박혜정 수필가의 리드로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명시 가운데 노래로 불리어 더욱 사랑받은 유명한 시를 함께 불렀다.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시의 마지막 행이 한국 추상화의 대부 김환기 화백의 그림으로 알려졌고, 형제 듀엣 ‘유심초’의 노래로 재탄생하면서 더욱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저녁에/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가을 편지/고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시가 노래가 되는 것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지 않을까. 시어에는 음률이 담겨있으니까 말이다. 장조의 밝은 기운이 들어 있는 행이 있는가 하면, 단조의 그늘도 행간에 숨어있다가 눈물샘을 자극한다. 시를 통으로 외우기는 쉽지 않지만 노래가 되면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다. 정원 문학회 덕분에 귓가에 맴돌았던 노래가 원래 노래가 아니었고, 시였다는 것도 알게 되어 뜻깊었다.
즐거운 시간은 좀 더 이어졌다. 머리에 하얗게 새치가 피어있는 어른들이었지만 야생화가 안팎으로 둘러싼 정겨운 정원 안마당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면서 골목길에서 놀았던 추억을 불러오는 시간이었다. 한나절을 박장대소로 웃고 마음껏 떠들어서 그런지 더위도 잊고, 피곤함도 잊었다.
줄리아 헤븐 김 수필가는 “마치 기차를 타고 찾아간 것 같은 여행의 설렘을, 푸른 풀밭에 놓인 야외 의자에 엉덩이가 푹 파묻히는 순간 깊은 계곡을 찾아 발을 담근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으로 여름을 즐긴 행복한 날이었습니다.”라며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후기를 남겼다. 김춘희 수필가는 “제 노후의 삶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도록 저를 문협에 이끌어주신 성령께 감사한 날이었습니다.”라면서 문인 활동에 대한 감격스러운 소회를 나누었다. 캘거리에 거주하면서도 다양한 집필 활동으로 참여하는 이정순 동화 작가는 문협의 단체 대화방에 올라온 행사 후기와 사진을 구경하기만 해서 아쉽다며 “야생화” 백일장 시제에 한 수를 올려 훈훈하게 했다.

들꽃/이정순
들꽃 따서 화관 만들고
들꽃 따서 연지곤지 찍고
들꽃 따서 꽃반지 만들고
들꽃 따서 원앙금침 만들어
너는 신랑 나는 신부
유년의 추억!

로터스 정 시인은 “먼 길 마다치 않고 한걸음에 달려와 주신 선생님들과 소중한 가족분들도 함께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어 감사드리며, 환대하느라고 건물사이를 맨발의 투혼으로 행사를 진행하고, 멋진 장소 제공과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신 박명숙 기도원장 내외분께 감사드린다.”라고 감사 인사를 했다.
모든 순서를 기획하고 진두지휘한 민완기 회장님에게 따로 소감을 여쭈었다. “백일장 응모작 중에 한시(漢詩)가 있었어요. 비록 입상은 못 했지만 기억에 남는 응모작들을 소개하고 싶군요. ‘가화불여야화향(家花不如野花香) 야화불여가화장(野花不如家花長) 집에 있는 꽃은 들꽃보다 향기롭지 못하지만, 들꽃(야생화)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또 한편은 ‘들에 피면 들꽃 채소밭에 피면 연지곤지 아빠가 꺾어 받힌 울 어메 부케더미 사랑한단 말 대신 내 가슴에 들꽃 무덤 한가득 피는 듯 지는 듯 향기인 듯 남겨 놓고 간 사람 들꽃 같은 그 사람’, 분주하고 쳇바퀴 같은 일상 가운데에서도 시심을 품고 사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일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요! 밴쿠버에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은 계절을 맞아 시제를 놓고 함께 겨루어 시심을 가다듬는 일이야말로 난향천리(蘭香千里)를 넘어 문향만리(文香萬里)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라며 문인 모임의 수장다운 깊은 소회를 전해주셨다.
‘잘 빚은 술향기는 백 리를 가고, 꽃향기는 천 리를 가지만, 글과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는 민완기 회장님의 말씀처럼 필자는 집으로 돌아와서 모임에 대해 더욱 잔상이 남았는데, 문인이라는 수식어를 일상 옆에 걸어둔 사람들의 여름 소풍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정원에서의 시간은 한적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지면을 통해 소중한 시간을 내어 모임에 힘쓴 모든 문우님께 감사하고 성심을 다해 행사를 준비한 임원분들께도 고마운 인사를 올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정원 백일장에 가장 많은 득표를 받은 세 작품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읽는 분들께도 그 여운을 남긴다.

정원 백일장 장원
<들꽃> 송요상
갈멜기도원 산책로에 피어 있는 들꽃들에는
수많은 성령들의 기도와 기원이 깃들어
찾는 이들마다 가슴에는 진한 감동이 스며 온다
한낱 푸른 숲과 잔디밭에 소망도 숨어 있어
우리들의 삶에 잊혀지지 않는 생활의 숲속으로
남아 있기를 빌어 본다

정원 백일장 차상
<문득 멈춤> 반현향
낯설고 고된 식당 일 마치고
들길을 걸었다 문득
삶의 시기가 멈추라고 부른다
안개 같은 생활에
끊임없이 다가가는 시각들
버릴 것과 간직한 것조차
무의미하다
이 순간 생애 한 가운데
바람은 불고
햇살 아래 대지는 끊임없이
움을 튼다
오롯이 떠 있는 구절초가
청초하게 피어 있다
바람에 흔들대는 꽃잎이 모여
지나가는 발길을 부르고 있다

정원 백일장 차하
<들꽃> 민완기
들판에 네가 없었다면
그 길을 걷지 않았으리라
소박하고
겸손하고
이름도 모를
네가
그곳에서 미소 짓기에
오늘도
들길을 걷는다

너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