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뒤를 밟는다는 건 그닥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망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시간의 주름을 헤쳐보는 것, 끔찍한 일이지. 노쇠하고 우둔한 자신과 마주하고 마지막 남은 자존감마저 추락하는 아노미 상태가 되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여사는 그 공포스러운 백트랙(Backtrack)을 감행하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방여사의 고명딸이 캐나다 북부, 작은 타운에서 5년 간 살다가 남쪽 타운으로 옮기게 되었다. 딸의 표현을 빈다면 버밀리온은 계절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프레리라고. 끝없는 초록 들판, 막힘 없는 파랑 하늘 아래 모두가 평화와 풍요를 누리는 천국이지만 겨울이면 영하 40도로 내려가기 일쑤고 하룻밤에 눈이 집채만큼 쌓여 눈감옥 같았다고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방여사는 풋여름과 초가을에 와서 딸의 목가적(牧歌的)인 생활을 부러워했었다. 딸이 안쓰럽고 짠했다. ‘그리 고생하다가 따땃한 과수 타운에서 살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하며 가슴을 쓸었다.
현 직장과 집주인에게 겨우 반 달 전 사직 및 퇴거 통보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직장은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집 렌트는 한 달 전 통보 기준에 미치지 못하므로 다음 달치 렌트비를 지불해야 한다. 한데 너그러운 집주인이 디포짓(반 달치)으로 갈음하겠다고 한다. 고마우니 후한 선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남편의 제안에 따라 꽤 큰 금액의 기프트카드와 멋진 탱큐카드를 샀다.
한 닷새쯤 지났을까? 얼추 이삿짐을 다 싸가던 중이었다. 딸이 잊기 전에 감사 인삿말을 적겠다며 카드를 달랜다. “네가 가지고 있잖아.” ”아닌데, 엄마한테 드렸는데요.” “그래? 에코백에 여직 있나?” “아니지. 잡동사니 담으라고 엄마가 나한테 빈 에코백을 주셨어요.” 방 여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무리 기억의 서랍을 뒤져봐도 카드를 받은 적도 꺼낸 적도 없다. 그날 오후내내 방 여사가 머리를 쥐어뜯고, 두 부녀는 이미 싸놓은 이삿짐을 뒤지느라 분주했다. 새벽에도 쥐 쌀가마니 갉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났다.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세 식구 중 누구도 편히 잠들지 못했으리라.
아침에 눈이 새빨개진 딸이 “카드 분실 사건은 이 시간부로 케이스 클로즈합시다. 집념이 넘쳐 집착에 이르는 사태가 예견되므로. 이러다 이사 가기도 전에 다 녹초가 될 거예요. ‘디 엔드’ 입니다! ” 선언을 하고 출근을 했다. 딸의 단호함에 감히 거스르지 못했지만 방여사 머릿속엔 은박 입힌 카드와 묵직한 선물권이 아른거렸다. 남편도 방여사 몰래 아파트 쓰레기 수거함까지 뒤적이고 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찾아도 없는 걸 보면 밖에서 잃어버린 거야. 당신, 까불다 흘린 거 아냐?” 물었다. “요즘 내가 좀 그래요. 깜박깜박하고 쉬 흥분하고. 내가 칠칠맞게 얻다 흘린 게죠.” 남편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그럼, 그 동선을 따라가면 찾을 수도 있겠다. 나갑시다.” 와, 일 났다. 이 남자 전투력에 불 붙으면 소방차가 와도 못 끄는데… . “아, 아니예요. 며칠이 지났는데 벌써 누가 집어갔거나, 그대로 있다 해도 비 와서 다 젖어 뭉개졌을 거예요. 딸하고 약속했잖아요. 사건 마감하기로.” 방여사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내 사전에 미제사건은 없는데… .” 그제야 남편이 자리에 앉았다.
딸과의 약속을 들어 남편의 수색을 일단 중지시켰지만 정작 방여사는 포기가 안 됐다. 흠. 분명 집안에는 없다. 그럼 밖인데… . 아마, 혹시… . 방 여사의 머릿속에 의문표 갈고리가 널을 뛰었다. 이런 일에는 감정적인 방여사보다는 냉철하고 예리한 딸의 분석력이 필요하다. 특히나 딸은 추리와 서스펜스 소설 매니아가 아닌가. 딸을 수색작업에 끌어 들이러 퇴근 시간에 맞춰 강아지를 데리고 마중을 갔다.
“어디선가 카드가 오도막이 앉아 기다릴 것 같애. 그날의 행적을 되짚어 보자.” 방여사의 제안에 딸은 “그 연세에 아직도 기적을 믿으세요?” 하고 웃었다. “마지막이니 성지 순례 간다 치자.” “버밀리온은 예루살렘이 아니지요.” “미스월드도 고별 행진을 하지 않니.” “난 미스월드가 아니야.”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이었다. 그러다 딸을 무너뜨릴 묘수를 생각해 냈다. 바로 탐정 게임. 손도 쓰지 않은 채 이대로 미제사건으로 남길 순 없다. 샬록 홈즈와 왓슨처럼, 긴다이치 고스케처럼 사건의 현장도 둘러보고, 탐문 조사도 해 본 후 깨끗하게 포기하자는 말이 딸의 승부욕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왕년에 이름깨나 날린 형사 전력의, 그 아빠에 그 딸이다.
#1. 카드 구매처: 쇼퍼스 드럭 마트
탐정, 매의 눈으로 엄마가 앉았던 혈압기 앞 의자를 훑어보고 카운터로 간다. 조수는 가게 이곳저곳을 누비며 바닥을 뚫어질듯 살핀다.
점원 : 뭘 도와 드릴까요?
탐정: 지난 금요일 오후 1시 27분에 $300 기프트카드와 $5짜리 탱큐카드를 구매했어요.
(영수증을 내밀며) 혹시 기프트카드와 탱큐카드를 보관하고 있지 않나요?
점원: (로스트 앤 파운드 바스켓을 들여다 본다.) 죄송하지만 없네요.
탐정: 아, 그렇군요. 다른 데 흘렸나 보네요. 고맙습니다.
조수, 쪼르르 다가와 메모지에 뭔가를 적어 내민다. 그걸 본 탐정이 얼굴을 찡그린다.
조수: 매니저에게 전해 주실래요? 혹시 찾으면 이 번호로 연락해 주시라고. 꼭 좀.
탐정, 조수의 행동이 부끄러운지 황망히 가게를 나간다.
조수: 야~ 여기가 가장 혐의가 짙은 곳이야. 그리고 여기 직원들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고.
탐정: 아니, 자신의 과실을 왜 남한테 뒤집어 씌우는데요? 무고죄로 고소당할 수도 있어요.
조수: 호통치는 게 너 진짜 형사 같다.
#2. 두 번째 방문처, 대형 부티끄 숍 크레이그, 유리문 앞에 ‘리타이어 세일 70%까지’ 사인이 붙어있다.
점원이 단아한 모습의 여자 노인을 서빙하고 있다. 탐정과 조수, 지난 번 써보았던 모자를 털어보고, 근처를 샅샅이 수색한다. 그 사이 점원이 다가온다.
탐정: 로스트 앤 파운드 건으로 왔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2시 경, 저희 둘이 쇼핑하러 왔었거든요. 이만한 봉투에 담긴… .
점원: (허리를 굽혀 계산대 아래를 한참 살피다가 제법 값나가는 목걸이 한 짝을 들어보이며) 이건가요?
조수, 화색을 띠며 다가오더니 이내 실망한다.
여자 노인: 어머, 중요한 걸 잃어버렸나 보군요. 어디선가 나오겠죠. 만약에 못 찾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누군가 요긴하게 쓰겠지 하고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되지 않나요? 호호.
조수:(혼자 중얼거린다.) 딴 사람이 주워쓰면 배 아프지 뭔 위안이 돼? 참 노인네가 오지랖은.
탐정:(조수 허리를 쿡 찌르며) 아유, 그렇죠. 귀한 말씀 고맙습니다. 인생이 로스트 앤 파운드 아니겠습니까? 잃은 게 있으면 뭔가 얻는 것도 있겠죠. (조수의 소맷자락을 끌며) 엄마도 참, 친절한 분한테 웬 앙탈이야.
#3 그 옆 갤러리, #4,길 건너편의 비스트로, 레드 블록, #5 펫 밸류로 장면이 바뀌지만 점원의 대답은 한결같다. 조수가 표정이 최고도에 올라 추락을 기다리는 롤러코스터에 탄 아이처럼 새파랗게 질려있다.
# 6 마지막 현장, 수퍼마켓: 축 처진 어깨의 조수와 여전히 생기발랄한 탐정이 곧장 고객 서비스 코너로 다가간다. 다행히 그 전날 응대하던 센터장이 맞는다.
센터장: 오, 당신 또 왔군요. 멤버쉽 해지했나요? 아님 딴 정보가 필요하신가요?
탐정: 아직이요. 오늘은 로스트 앤 파운드 건으로 왔어요. 5.5”x4 1/4” 사이즈 흰 봉투에 플라스틱 카드와 영수증이 들어있는데요. 습득물 신고된 거 있나요?
센터장이 우산이랑 열쇠뭉치 등이 든 꽤 묵직한 상자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놓는다. 조수가 달려와 살펴 보지만 찾는 물건은 없다. 탐정이 웬지 신나보이는 얼굴로 샐쭉해진 조수의 등을 토닥거린다.
탐정: 현장, 탐문 수색 다 해봤지만 물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이제 됐죠?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용기고 분별이라며.
크레이그에서 만난 여자 노인이 불쑥 모녀 앞에 나타난다.
노인: 찾았나요? 에고 저런. 그냥 흘러가게 두세요. 손가락 사이에 모래가 흘러가듯. 지금은 아깝겠지만. 사물도 사람도 언젠간 가잖아요? 난 50년지기 남편을 삼 년전에 떠나 보냈어요. 처음엔 죽을 만큼 힘들더니 지금은 훨씬 나아졌어요. 그리고 지금은 남편 소망대로 포에버 19으로 살고 있어요. 이렇게 머리도 갈색으로 염색하고 옷도 소녀 소녀하게 입구요. 호호.
여전히 깔깔거리는 그녀가 밉지 않다. 함께 늙어가는 처지라 통해서인지 서로 두 손을 꼭 잡고 이름과 나이를 나눈다. 쉐린, 셀린. 이름도 비슷하고 68 세, 71세. 나이도 비슷하다. “내가 언니야.” 방여사가 쉐린의 어깨를 툭 친다. 그러자 쉐린이 방여사의 은발을 가리키며 “맞아 맞아, 당신이 언니야.” 하고 엄지를 들어 올린다.
방여사의 머릿속에 들어와 와글거리던 자벌레들이 스르륵 빠져 나간다. 방여사의 집착과 혼돈을 잠재우기 위해 멀리 우회할 필요도 있고 여과시킬 시간이 필요했던 게지. 딸의 속깊은 배려와 쉐린의 명쾌한 인생담론이 평형수가 되어 기울어가는 배의 균형을 잡아준 셈이다. 비록 자산을 유실(流失)하였으나 그보다 큰 노년기의 분별과 지혜를 습득하고 방여사가 돌아간다.
방여사가 수박만한 엉덩이를 흔들며 소리 높여 “렛츠 고 홈.”을 외친다. 그 뒤를 복숭아 같은 딸이 따른다. 하늘 가득찬 노을을 배경으로 청둥오리처럼 뒤뚱거리며 떠나는 모녀의 모습이 줌 아웃, 페이드 아웃된다.
“아디오스 아미고(친구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