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건강

2025-05-14 16:30:16

이민 수기 양영승의 ‘태극기가 나 영승이를 알아보는가?’

네번째 이야기

가정과 건강… 사랑으로 회복
캐나다에 정착하여 이날까지 살아오는 동안 두 딸을 더 주시어 4명의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생활해 오던 중 갑자기 간에 이상이 생겼다. 의사는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으니 쉬어가면서 일을 좀 줄이고 음식을 주의하라고 나에게 큰 경각심을 주었다.
몸이 약해지니 떠나온 고향이 몹시도 그리워져서 한국에 나가 약 한달 동안 머물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사는 날까지 식구들을 다시 한국에서 살게 할까 하고 별 의별 생각을 다하였다. 괴로웠던 나날속에 종종 어머님 산소를 찾았다. 고국을 떠나기 전 무릎 꿇고 기도드리며 성공하여 돌아오겠다고 다짐하고 고향을 떠났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 병이 들어 돌아왔으니! 어머니 이 일을 어찌 할까요! 하면서 애통해 할 때에 어머님께서 “영승아! 이제부터는 네 형제들이나 누나, 조카들에 대하여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네가 뿌린 씨앗들, 네 자식들과 식구들만 생각하고 살아라. 여기 식구들은 이제 다들 자기들이 알아서 잘살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래요! 어머님! 어머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명심하고 지체하지 않고 가겠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또 청운의 꿈을 안고 어린 자녀들이 기다리는 밴쿠버 가족 품으로 돌아와서 비록 몸은 병들었지만 새로운 각오로 날 위해 기도해 주시는 어머님과 나를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을 의지했다. 간에 좋다는 당근 주스를 매일 만들어 주는 아내의 꾸준한 정성에 감사하며 생활 반경을 줄이기로 하고 정들었던 언덕 위의 아름다운 집에서 12년 간의 좋은 추억을 남겼다. 또 생활 반경을 줄이기 위하여 공장이 좀더 가까운 밴쿠버 빅토리아 40가 근처로 내려와 오직 교회와 공장과 집 만을 오가며 근신하는 마음으로 투병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간증 집회와 트래스디아스와 신앙수련회를 통하여 주님의 은총 으로 건강도 점점 회복되어 갔다.
공장은 여전히 운영 되어가고 있음에 감사를 드리면서 그동안 방심했던 나의 생활에 회개하는 나에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알아주시어 나의 몸도 차츰 회복시켜 주시고 마음의 여유도 주셨다. 그때에 큰 딸이 SFU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연세대학원에 다니던 중에 신랑감을 소개받아 사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건강 할 때 한 자녀 라도 출가시켜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집을 보내기로 하였다.

로타리 클럽 활동… 한국방문
큰딸을 출가를 시키고 나니 우리 부부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 때부터 내가 속해 있는 캠비 로타리 클럽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국제 로타리 컨퍼런스(Conference) 에도 여러 번 참석하면서 세상 구경도 하고 2016년 5월 28일 에는 한국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밴쿠버 5040 지구 회장 내외분 이곳 캐나다 로타리안 28명 들과 함께 참석했다. 모든 일정을 성황리에 마치고 서울 명소들도 구경하며 저녁식사 시간에는 인사 동에 소재한(처마끝 하늘 풍경)이라는 한정식 식당에서 한국 음식을 대접하고 친교도 하며 작은 보람을 느끼면서 즐거운 저녁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다음날은 동료 여러 명이서 명동 거리를 활보하면서 새로운 명물들 과 가개들을 구경하고 다녔다. 아울러 길거리 자판 음식들을 하나 둘 맛보다가 군것질로 그만 우리 일행은 점심을 대신하기도 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30~40여년 후 세계 속의 한국에 나와 있는 시간들로 착각할 정도로 발전되어 있는 우리나라를 보면서 각국 다른 외국 관광객 들과 함께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잠깐 나의 힘들었던 이국 생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가고 있었다.
아내의 건강 회복… 장학금 후원
1995년 1월20일 경에는 아내가 오랫동안 낯 설은 이민생활의 고됨으로 인해 갑자기 뇌출혈로 의식 불명 속에서 11시간의 대수술을 받고 여러 날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해가며 조심스럽게 정상적인 생활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에 새로운 감사한 일을 해야 할 뜻깊은 하나의 사명을 주셨다. 지난해 교회 남선교회 회장으로 일을 할 때 남선교회 주관으 로 (송년회 및 장학의 밤) 행사를 여선교회와 각 부서와의 협조 하에 잘 치루었다 그래서 해마다 연말이면 여러 교인들과 소통하면서 서로 보람을 느끼고 선교의 목적으로 모금된 기금을 나의 교회와 가까운 고등학교 2곳에 크리스찬 마인드가 있는 졸업 생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 다음해 연말 행사에서 모금한 금액을 이듬해 초 회장단에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못 주는 금액을 다른 나라 아이들에까지 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교회내 우리 아이들을 불러 세워놓고 기금을 다 나누어 주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내가 예년에 시작한 장학사업이 사정상 중단해야 할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이웃 사회에 우리도 함께 참여한다는 보람을 가지고 큰 마음먹고 시작한 장학사업을 이대로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또한 두개 학교로부터 어렵게 승낙받은 그 사업을 어떻게 해야할까 하고 고민했다.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정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순종하는 마음으로 결단하고 ‘하나님! 제 아내의 건강을 아시지요! 담당 의사님께서 당부하시기를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속마음 다 내려놓고 살아가면 앞으로 10여년은 아무 탈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살아 가겠습니다”고 기도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사업은 나와 우리 가정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실행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해 6월 졸업식에 맞추어서 3,4,월경에는 미리 송금하여 실행해 옮겼다. 내가 바빠서 못 참석 하면 딸들이, 때로는 당년에 사회 봉사부장이나 부목사님, 목사님께서도 졸업식에 참석하셔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증여해오고 있다. “아내의 건강이 다 할때까지 이사업을 (Vancouver Han-in Church Aard) 이름으로 (Gladstone과 David Thompson Secondary School) 에 보내야겠다는, 하나님과 저 양영승이와의 무언의 약속으로 여기고 계속 실행되어 갈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고 나는 기도했다. 아내의 수술 후 이날까지 옆 에서 잠을 자는 아내의 숨 소리가 안 들리면 불안해 하는 내 마음을 아시는지 조심스럽게 ‘드르릉’하고 들리는 코고는 소리는 지금 까지도 나로 하여금 포근한 잠을 자게 해 줍니다.

글 사진 양영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