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최금란
수필가, 전 밴쿠버 한인회장
예전에 밴쿠버의 여름은 그다지 무덥지 않았다. 여름에 섭씨 30 도 이상 되는 날은 손을 꼽을 정도였다. 열대야 현상 같은 것은 먼 나라 얘기였다. 에어컨이 있는 집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한국 여행자들이 밴쿠버에 오면 여름에도 솜이불을 덮고 잤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여기도 여름이 덥다. 생태계의 변화에 따른 이상 기후 때문이다. 그래서 마트에서 선풍기, 에어컨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서울의 경우 7 월에 열대야가 22 일이나 지속되었다. 118 년 기상 관측 역사상 가장 뜨거운 7월의 기록이다. 밤낮의 평균 기온이 29 도에 가까웠다. 기상학자들은 7 월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8 월이 더 무덥다고 한다. 서울만 더운 것이 아니고 전국 어디나 불볕더위와 열대야로 신음하고 있다. 한국에 비해 이곳 여름은 그다지 덥지는 않지만, 가끔 견디기 어려운 찜통더위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이러니 사람들이 만나면 날씨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대형 몰에 가서 더위를 식히고, 심지어 도서관에 가서 그냥 피서하고 있다.
여름 더위엔 수박보다 더 시원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 마트마다 유난히 수박이 많이 팔리고 있다. 예전에 토론토 살던 사람들이 밴쿠버에 오면 수박이 맛이 없다고 불평했다. 온타리오주의 경우 대부분의 수박이 미국 미시건주에서 온다.
여름이 무더우므로 모든 수박이 달고 맛있다. 밴쿠버는 날씨가 그다지 덥지 않아서 워싱턴주에서 온 수박이 맛도 없고 상당수는 잘 익지 않았다. 올해는 다르다. 마트에서 산 수박은 대부분 잘 익고 맛도 좋다. 다행한 것은 예전에 비해 수박 가격도 퍽 저렴하다.
서울의 올해 수박 가격은 보통 3 만 원을 넘는다. 좀 비싼 것은 5 만 원 정도이다. 여기 돈으로 환산하면 50 불이다. 여름철 폭염과 일조량 부족 등으로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는 10 불 정도면 크고 맛있는 수박을 쉽게 살 수 있어서 다행이다. 밴쿠버에서 수박 한 통에 30-50 불을 지불해야 한다면 금값이라고 수박 먹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수박은 93%가 수분으로 되어있다.
여름철 걸리기 쉬운 탈수 현상을 방지한다. 수박은 항산화 성분인 리코펜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젊음의 과일이라고 불리고 있다. 심장병과 암 예방에 좋으며 근육 통증을 완화해 준다. 수박의 단맛이 혈당을 높여준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혈당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타민 C 보다는 A 가 풍부하고 쉽게 소화되는 건강 과일이다.
사람들은 너무 흔한 것에 가치를 낮게 보는 경향이 있다. 쉽게 구할 수 있고 또한 저렴하기 때문이다. 최영미 시인은 수박을 “땅 위의 달”, “심오함의 창고”라고 표현했다. 작가 허수경은 수박을 보면서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라고 했다.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라고 노래했다.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을 쓴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 (Mark Twain) 은 이 세상 사치품 중 수박이 으뜸이고 과일 중의 왕이라고 했다. 수박을 맛본 사람은 천사들이 뭘 먹는지 알게 된다고 수박의 가치를 최고로 꼽았다. 그는 소년 시절에 미시시피 강변의 소도시에서 수박을 하나 훔친 일이 있다. 수박을 쌓아 놓고 농부가 파는 데 정신이 없는 사이에 수박 한 통을 훔쳐서 뒷 구석에 가서 돌멩이로 수박을 깨보니 붉은색은 찾아볼 수 없는 풋과일이었다. 그는 배짱 좋게 설익은 수박을 들고 가서 농부에게 보이고 먹을 수 없는 수박을 팔았다고 일장 훈시를 했다. 그렇게 해서 잘 익은 수박 하나를 받아서 맛있게 먹었다. 마크 트웨인이 후에 수박 훔친 얘기를 한 것은 정직하지 못한 짓에 대한 반성이었다. 훔친 것은 나쁘나 솔직히 과거의 잘못을 시인했다는 의미에서 그는 천성이 바른 사람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아직도 8월한 달이 여름이다. 얼마나 더울지 좀 걱정된다. 하지만 수박을 먹을 수 있다면 더위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니다. 수박 한 통을 식탁에 쪼개어 놓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 있다면 삶은 행복이고, 여름은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