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간혹 그리고 직접 그런 말을 들었다. “늙으면 죽어야지.” 어려서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사람 늙으면 죽나보다. 사람 늙으면 별 것 없나 보다. 사람 늙으면 樂(낙)이나 희망없나 보다. 그런데 꼭 그렇지가 않음을 나이 들어가면서 알게 됬다.
한의원에 노인들이 방문한다. 그 중, 70 후반의 여성 환자를 진료하면서, 노년의 의지 혹은 희망을 본다. 그 중 한 분은 여성이요 체질은 수양인. (소음인의 양인). 그 시대에 석유 화학 계통에서 일하는 여성이 얼마나 됬을까. 말을 들어보니, 그 분야에서 당차게 일했다고 한다. 60대에 은퇴하고 별 무리 없이 잘 지내다가 70대 초반에 갑자기 찾아온 관절통증으로 그야말로 밤에 잠을 잘 수 없는 상태로 본원을 방문했다. 체중은 많이 나가고, 특히 무릎 통증과 뻣뻣함으로 때로 거동조차 불편하여 일상 생활에 크게 지장을 받자, 삶이 그렇게 힘들고 재미없다고 처음 방문했을 때 한 말이 벌써 3년이다. 체질에 맞게끔 치료를 받으면서 다행이 통증이 많이 가라앉아, 수면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고 또한 정상 생활하는데 무리가 없게 되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통증 조절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방문하고 있는 그 노인을 통해서 노년기의 어떤 삶의 의지나 희망을 보게 된다.
필자는 수양인 체질을‘ 端雅(단아:사전적 의미는 단정하고 아담으로 나오지만 필자는 여기에 어떤 깨끗한 미를 추가하고 싶다) ’하다고 표현한다. 수양인 여성 가운데는 몸매 잘 잡히면서 얼굴 미인이 많다. 남성 가운데는 그리 비만하거나 아주 깡마르지 않고 아담한 경우가 많다. 음인이지만 몸이 날래고 운동신경이 잘 발달되어 있다. 필자의 이해로는 체조 선수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이 체질일 것이고 체조는 이 체질에 잘 맞는다.
수양인 체질은 완벽을 추구하는 편에서 모든 체질 중에서 으뜸이다.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기에 심적으로 안정이 없거나 신경증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세심하고 정확한 것을 지향한다. 정리정돈에 능하다. 그리고 어떤 ‘셈’ 혹은 ‘계산’에 밝다. 타산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실제 사무실에 앉아서 장부 정리같은 일에 능하다는 뜻이다. (직업을 논한다면 회계사 일에 능할 수 있다. 혹은 글쓰는 직업도 어울릴 수 있고)
한편, 남의 말을 쉬이 받아들이거나 믿기보다는 의심하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넌다”는 속담에 해당할 수 있으려나.
70대 후반의 환자와 올 때마다 허물없는 대화를 나눈다. 3년을 방문했으니, 아닌게 아니라, 어디에 살고, 어떤 집에 살며, 가족 상황이 어떠하며, 취미는 말할 것 없고, 저 멀리 사는 먼 친지까지 서로가 훤히 꽤 뚫게 됬다. (좋은건지 안 그런건지)
그녀는 바쁘다. 아픈 남편을 케어하느라 손이 많이 가고, 주변의 적지 않은 친구들과 만남으로 바쁘고, 집안을 손수 청소 하느라 바쁘고, 몸의 통증이 가라앉고 거동이 훨씬 나아지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바빠 보인다.
수십년을 직업적으로 무난히 보내고 은퇴후 비교적 여유있고 한가로운 삶을 사는 그녀에게, 여전히 뭔가 정확하고, 꼼꼼하고, 단정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노년기에 건강문제가 좀 있어도, 여러 일을 계획을 가지고 감당하고, 사람을 만나며, 과식하려 하지 않고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와의 관계에서 별 문제가 없어 보이고 그리고 관심있는 책을 한두권씩 가까이 하는 노년이라면, 그리고 그 나이에 인생의 어떤 限(한) 혹은 悔恨(회한)이 가득하지 않다면, TV에서 간혹 들리는 혹은 직접 듣는, “늙으면 죽어야지” 또는 “자식에게 짐 되지 말아야지” 하는 좀 운명적이고 수동적인 마음가짐 혹은 태도와는 무관한 것 같고 좋아 보인다.
일반적으로 노년기의 시작을 65∼75세로 본다. 노년기에 이르면 신체 각 기관의 기능이 저하되며, 정신적 제반 능력도 점차 감퇴한다. 그리고 사회적 신분을 상실하거나 경제능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또, 심신의 기능이 쇠퇴하고 건강을 잃기 쉬우며 활동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자주성을 잃고, 의존성이 증대한다. 노년기는 청년기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주관성이 강해지는 시기이다. 그런데 청년기의 주관성은 주로 경험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지만 노년기의 주관성은 과잉된 경험에서 유래하는 경우가 많다. 노인은 흔히 완고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과거의 경험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두산 백과)
지금은 70대 초반이 된, 미국의 대학교수를 통해서 들은 말이다. 90 중반이 된 정년퇴직한 전직 교수가 특강차원에서 강의를 하는데 여전히 힘이 있어 보이고 그렇게 명강의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질문, “교수님은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가 좋으십니까?” 답변, “저는 60대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20대는 내 인생문제로 바뻤고 30대는 가정의 가장으로서 집안 세우는데 바빴고 40대와 50대는일, 요구, 책임등으로 바뻤습니다. 60을 넘으니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어떤 여유를 가지고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 인생 중 가장 풍요로운 때였습니다.”
직업이 대학교수 든 한 기업의 총수 든, 직장인이든 자영업자이든, 나이 60에 들어서 조금 자유함이 있고 어떤 풍요로움을 느낄수 있다는 소견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나이 60중반부터가 인생의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이 60중반이 또 하나의 인생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니, ‘노년’이란 말 자체가 별 의미있어 보이지 않는다. 인생의 끝이 어디인 지 모르는데, 굳이 ‘노년’이란 표현을 쓸 것은 무엇이란 말이던가. 나이 20에 운명적, 부정적이 된다면 그 나이가 인생의 끝자락과도 같을 것이고, 나이 여든이나 아흔 혹은 백에도 여전히 능동적으로 소소하게나마 주어진 일을 감당하면서 산다면 이 역시 인생이 아름답고 의미있다고 해도 누가 실없는 소리한다며 반박할 수 있을 것인가.
“늙으면 죽어야지.” 필자는 이 말을 사실, 적지 않게 들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노년기에 있는 그 누구로부터도, “이 정도 살았으니, 이제 죽고 싶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프면 치료받아 건강하고 싶고, 조금 더 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래서 “늙으면 죽어야지”와 같은 말을 누가 만들었는 지 묻고 싶다. 사람 나이 들고 늙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왜 꼭 ‘노년’을 ‘죽을 때’라 할 것인가. 사람 나이 스물이든,여든 혹은 백 스물이든 사람이 호흡하고 움직일 수 있고 더불어 인지할 수 있다면 그 안에는 생명의 힘이 작동하고 있고 여전히 고귀한 것이니, ‘老’와‘ 죽음’을 연계시키고 싶지 않고 특히‘老’라는 말이 부정적, 운명적으로 이해된다면 그런 ‘노’란 말을 인생의 사전에서 지운 체 살아가고 싶다. /다니엘 한의원 604-790-8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