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13일 ThursdayContact Us

북한에서 8박 9일의 기록 3

2026-08-13 11:21:42

2007년 3월 25일 일요일
현장 정문에는 개인 군장에 방한복과 방한모자를 쓴 한 여성병사가 M1 같은 장총을 메고 보초를 서있다. 국가시설이라 무장 군인이 현장을 방어한다. 현장에는 남한에서 시공 발주를 받은 회사(설계사/감리사 겸임, 시공사)측으로부터 2명의 직원이 와있다. 이렇게 해서 공사(투자사) 직원 2인 과 나를 포함해서 5인이 시운전을 하게 되었다. 현장 사무실은 콘크리트 2층(건평 1500평은 넘을듯) 건물인데 이곳은 북한 관계자만 출입이 허용된다. 1:1로 합자투자인데, 참 알고도 모를 일이다. 시운전을 위한 사무실 겸 숙소(식당, 주방, “욕실” 포함)는 임시로 콘테이너 몇개를 붙여서 만든 곳으로 내가 든 방에는 접이식 야전 침대(남한에서 보내준 것임) 1개와 조그마한 책상이 있다. 침대에는 요, 이불, 담요 이외에 전기 담요1장이 있다. 크기가 4평 정도되는 다른 방에는 4인이 쓴다는데 침대는 없고 이불, 전기담요 이외에 전기장판도 있다. 장작을 때는 난로가 방 한쪽에 있다. 그런데 장작은 어디서 구한다? 전기 담요/장판과 담요는 작년에 남한에서 현장 기자재, 도구를 보낼 때 겹쳐서 보낸 것이란다. 밤새 털털거리고 달려온 터에 따끈한 라면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지난번 올때 몇 Box들고 왔단다. 방문자들의 숙소에는 간이용 10KW 짜리 디젤 발전기가 있는데 디젤 연료를 맘대로 쓸 수가 없어서 하루에 몇 시간도 사용할 수가 없다. 발전기를 돌리자니 자동차 연료를 빼야하고, 디젤 연료배급은 중앙 본부의 특명이 있어야한다. 시공사 직원이 미화 10불을 주면서 장각을 사오라고 주문했다. (북한에서 외부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통화는 미불, 유로화, 오직 2종류다. 북한지폐는 구경도 못했다.) 얼마 후 장각꾸러미 2단이 도착했다. 자세히 보니 장각은 몇 토막 없고 꾸불꾸불한 나무 뿌리 토막들이 대부분이다. 근처 산등성이에는 채벌할만한 나무는 별로 없고 뿌리마저 땔감으로 써야될 지경일까?
현장을 한 바퀴 대충 돌아보며 시운전을 위한 점검을 했다. 전기가 없으니 별로 할 일도 없어 냉방에서 외투를 입은 채로 야전침대에서 쭈그리고 한잠 잤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는 소리에 깨어보니 세상은 새까만 암흑이다. 몇 개의 촛불아래서 저녁을 먹으니 착잡한 기분이 든다. 식사 때 감시원인지 하는 참사위원이 부루퉁한 얼굴로 한마디 한다. 아까 오후에 혼자서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몇 사람들을 만나고 하는데 다음부터는 그러한 일 하지 말란다. 자기 허락 없이 또 자기가 입회하지 않은 대화나 모임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운전하러 온 사람한테도 아주 감시가 지독하다. 들쭉술도 한잔했겠다, 전기도 없겠다, 그냥 냉방에서 오바 쟈켓, 양말도 신은 채로 쭈구리고 꼬부리고 한참을 자는데 새벽1시쯤인가 전기가 들어왔다며 소란이다. 현장에서 앉아 밤을 새며 기다리던 야간조 종업원들이 운전을 시작한다기에 화들짝 뛰어나갔다. 급광기와 마광기의 모타 작동을 시작했다. 하나 둘씩 윗 단계부터 급수 펌프, 급광기, 마광기 모타도 시작했다. 한30분 지나서 이제 자리가 잡히나 했더니, 푹~욱 하고 전기가 나가면서 다시 암흑세상이 됐다. 정전이다. 언제 다시 전기가 들어올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2007년 3월 26일 월요일,
아침8시에 일어났다. 밤사이 전기가 2번이나 들락날락했다. 현장 가동하려고 신발 챙겨 신고 나가려고 하면 꺼지기가 두번. 냉방에서 하도 꼬부리고 잤는지 기지개도 펴지지 않는다. 물 트럭이 일주일에 한번씩 연안 쪽으로 나가 수돗물을 싣고 와서 사각형의 저수조에 부어 놓고 현장의 식용수로 사용한다 (50년도 고등 학교시절 살던 돈암동집에 비슷한 목욕탕이 있었음). 숙소 살림 용수는 오직 욕조통 물이다. 살어름이 낀 욕조 물통에서 한 바가지 퍼서 고양이 세수하듯이 차가운 어름 물칠만 했다.
아침을 먹는데 전기가 들어왔다. 곧 다시 전기가 나갔다. 오늘 하루 전기사정은 한심할 정도다. 오후 1시10분부터 30분까지, 오후 2시20분부터 40분까지, 오후 4시30분부터 5시10분까지, 6시15분부터 8시20분까지, 밤 11시부터 새벽3시까지, 이렇게 전기가 들어오면 현장으로 뛰어나가길 하니 기진맥진이다. 현장에는 이미 디젤 발전기2대(110KW, 92KW)를 설치해 놓았다. 공장 전설비용량 1650KW에 1/4정도 밖에 안 되지만 디젤연료 조달대책은 없다.
밤중에 4시간정도 들어온 전기로 현장을 가동해보니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한다. 광액 탱크가 넘친다. 배송 파이프 size가 너무 작다, 펌프는 용량이 적다. 제일 큰 문제는 설치된 부유선광기 와 탈수기 등은 설계도와 시방서에 기재한 바와는 완전히 다른 아주 저질의 중국산으로 스펙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설계자는 제대로 설계를 했다해도, 시공자가 헐값의 저질품을 구입해 설치했는지, 감리자는 이사실들을 몰랐을까? 투자자는 이 모든 상황을 몰랐을까? 아니면 시공자와 감리자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를 했을까? 그렇다고 내가 이자리에서 설계도와 완전히 다른 기자재들을 설치했다고 따질 입장이 아니다. 사실 투자자, 설계자, 시공자 감리자 모두 합의 결제가 끝났고, 준공식까지 거창하게 치룬 마당에 나에게는 이의를 제기할 의무도 권한도 없다. 오직 최종 보고서에 기자재 설치에 관한 현상과 내 의견을 제출하면 될 것이다.

3월 27일 화요일,
아침부터 신기하게도 전기가 들어와 있다. 그러나 공장을 가동하는 대신 고쳐야 할 문제점들의 보수작업에 관한 내 의견을 제시하고 당장 보수가 가능한 작업을 시작했다. 점심 후 서울 광물 공사 본부와 교신하기 위하여 연안 읍을 거쳐 국제전화가 가능하다는 해주시로 갔다. 남-북이 합작 투자하는 현장에 사무실 건물은 거창하게 지워놓고도 교신할 전화가 없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약70Km (180리) 길인데 비포장도로로 털털거리며 2시간이 넘게 뿌연 먼지를 뿜으며 달렸다. 시골 길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몇 명이 있다. 가까운 장터로 물물 교환하러 가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조그마한 텃밭에서 거둔 작물을 다른 것과 바꾸어 생활한다고. 비포장 도로이지만 인가가 몇 채 있으면 으레 “강성대국” 어쩌고 하는 것, “인민의 적, 미제 박살내자” 아니면 “친애하는 김정일 장군, 결사옹위”하는 등의 색 바랜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해주 호텔의 부설 우편소로 가서 서울 본사로 “간접적”이나마 팩스를 전송했다. 호텔 로비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교환소는 우리나라의 50년도의 교환 장비 같이 생긴 것으로 교환 아주머니가 손으로 회전기를 몇 바퀴 돌려 상대편 교환을 불러 연결시킨 후 아래 단의 잡아 빼는 줄, 위에는 이 뺀줄을 끼워 연결하는 식의 교환기다. 교환아줌마 옆에는 아주 구식의 전화기와 팩스기가 놓여있다. 우선 첫째로 “팩스” 보낼 내용을 종이에 볼펜으로 잘 적는다. 이 적은 내용을 참사위원에게 보여주고 수정을 받는다. 일단 현지 정보 담당자를 거쳐야 한다. 둘째, 북경에 있는 서울 본사의 지사에 전화를 한다. 전화내용도 아주 간단해야 한다. 즉 “조금 후에 팩스를 보내니 본사에 전달해서 회신을 받은 후 이곳으로 다시 보내 주시요.”다. 셋째, 팩스를 보낸다. 북경으로 하는 전화도 물론 평양의 감청을 받는다. 중국 북경의 수신자 번호로 보낸 팩스는 직접 북경으로 가지 않고 평양의 어디로 (보위부) 보내져서 또 검열을 거친 다음 수신자인 북경으로 보내진다. 이렇게 하는데 약 2시간이 걸린다. 교신료는 전화, 팩스 모두 1분당 미화로 8불이란다. 북경 지사에서 팩스를 받으면 이를 다시 서울 본사로 팩스 해야 한다. 서울로부터 회신은 언제 올지 모른다.
혹시해서 교환아줌마에게 미국으로 전화가 가능하냐고 아주 조용하게 물었다. 돌아온 퉁명스런 대답 “양키 제국놈들과는 상관 안 합네다” 다. “그러면 카나다는요?” 하고 물으니 카나다와는 우리 공화국과 국교가 되서 전화가 가능하단다. 카나다 집으로 전화를 했다. 오밤중에 전화를 받은 집사람이 놀랜 목소리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 했다. 옆에는 참사위원이 듣고 있다. 옆에 있던 참사위원이 퉁명스럽게 “박사 선생! 왜 영어로 합네까. 내가 못 알게”. 아주 노골적으로 감시를 한다. 그래서 “그 사람 영어밖에 모릅니다” 라고 조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56초라면서 1분값 8불이란다. 미화 10불은 주니 거스름돈 2불을 준다. 이상하도록 신기하고 기특하게도 해주의 작은 우편소에 미화가 존재한다. 이 해주 호텔(려관)에는 가끔 중국선박의 승무원들이 투숙한다.
저녁은 이 호텔 식당에 미리 준비를 시켜놓았다며 또 들쭉술에 닭고기 볶음이다. 손님이라곤 우리 일행5명이 전부다. 식사가 시작되어 날이 저물자 천정에 몇 개의 전등을 킨다. 100볼트 자리에 40왓트 전구를 끼운것 같이 침침하다. “려관”직원이 들어오더니 창문에 걸린 커튼을 꼭꼭 챙겨 불빛이 새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옛날 6.25 전쟁시 등화 관제하는 것 같다. 호텔 밖에 사는 일반 주민들은 전기 혜택(?)이 없는가 보다. 밤늦게 숙소에 돌아오니 새벽 1시가 다 되었다. 코트 입은 채, 양말 신은 채, 머리에 털모자 쓴 채 꼬부리고 움추리고 잤다. 콘테이너 방이지만 영하 5도의 밖이나 다를바 없다.

글 김 주영
1966, 인하공대 졸업, 1969, University of Missouri-Rolla, Graduate School, 공학석사, 1970-1972, 한국 KIST 제련연구실 연구원, 1973-2002, Noranda Inc.(현재 Glencore사) Senior Metallurgical Scientist,2003-2017, 대한광물자원공사(광진공), 삼성물산(해외자원사업), 고려아연, Ambatovy사 기술고문. 서울공대, 인하공대, 한양공대, 전남공대, POSCO E&C, 단기강좌(Short Course) 초빙교수 현재 써리 거주

10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나의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북한에 가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일들을 글로 남겨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개칠하듯이 가끔 긁적거렸던 노트를 정리해서 순서대로 몇자 적어본다. 현지에서 그때그때 간단히 일기처럼 메모한 것들 것 모아 보았다. 원래 글 재주가 없는데다가 우리말을 써 본지도 오래돼서 무슨 글인지도 모르겠다. 몇년 전의 사건이고 부분적이지만 북한의 상태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