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 임현숙

휴가 / 임현숙

식구들이 여름휴가를 떠났다 자리다툼을 하던 신발들도주인에게 끌려현관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여행 가방에밥 냄새와 빨래와몇 가지 의무를슬쩍 밀어 넣었다 이제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식탁 위의 고요는먼지를 핥으며 자라고 한낮의 햇살이소파 위에서게으른 고양이처럼 몸을 늘인다 내 안에 방 하나 비워진 오후문득한 채의 빈집이 되고 싶다 햇살이 푸르게 자라고 바람의 메아리가머물다 가는 집....
가을 / 윤문영

가을 / 윤문영

가을은 왜 이렇게 투명 한가 멀어야 보이는 것 멀리 있어야 보이는 것 가까이 가면 사라지는 것 사뿐 앉았다 이내 사라지는 새벽 이슬 보려고 하지 말라 안 보아도 이미 여기 앉아 있고 잘 보이려고 하지 말라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넌 투명하다 잘 하려고 하지 말라 잘 안 하려고 해도 이미 넌 완전한 가을 이다 멀어야 보이는 가을은 그래야 더욱 잘 보인다 팔등에 부드럽게 앉은 바람은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네 마음을 다 아는 양 소소한 바람 너에게 뿌리고 멀어 간다...
오 년 걸린 만남 / 양한석

오 년 걸린 만남 / 양한석

“ 베이비 컴잉 쑨!”또렷이 아이스크림 케이크 위에 써진 글자가 보였다. 딸 부부가 새해맞이 가족 모임을 주선했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한 식당 자리였는데, 오랫동안 기다려온 임신 소식을 분명히 발표하는 서프라이즈 식사였던 것이다. 결혼 후, 오 년 동안 아기 소식이 없었던 딸을 바라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 한구석 남아 있었다. 아마 근심의 그림자는 자신이 만든 조바심에서 생긴 그늘이었을지도 모른다. 생명이 찾아오는 길은 인간의 계획이나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익히...
떠난 뒤 보이는 것 / 정효봉

떠난 뒤 보이는 것 / 정효봉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적막한 거실에서 나는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이 아른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모두 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덤덤하게 가라앉은 집 안 분위기에 나 역시 조금씩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늘 바빠 얼굴조차 마주하기 힘든 딸아이의 기척만이 간간이 그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그렇게 텅 비어 있던 고요한 공간에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딸아이의 결혼식을 앞두고 모두가...
북한에서 8박 9일의 기록6

북한에서 8박 9일의 기록6

3월 31일 토요일당분간 현장에 잔류하면서 내가 지적한 시설의 보수·보완 작업을 관리할 사람들과 작별하고 오전 10시에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참사위원이 출국 수속을 아주 간단히 처리해 주었다. 이럴 때는 ‘빽’이 좋기는 좋다.북한을 빠져나오기 전, 정말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 있었다. 순안공항에도 명색이 국제공항인 만큼 면세점 몇 곳이 눈에 띄었다. 한 상점에 들어가 소위 북한의 명물인 ‘들쭉술’을 두 병 사려고 계산대에 올려놓았다.그러자 아리땁고 엷게 화장한 판매원...
북한에서 8박 9일의 기록 5

북한에서 8박 9일의 기록 5

3월 30일 금요일 2연안을 지나 평산까지는 비포장도로이고, 평산부터는 전날 밤 내려올 때 이용했던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다. 연안–배천평야는 구획 정리가 잘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사리원평야는 더 넓다. 아주 먼 곳까지 구획 정리가 잘된 논이 보인다.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농지개혁이라는 구실 아래 구획 정리를 철저히 해놓았다. 이것은 농사를 기계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위면적당 소출량을 정해 구역마다 경쟁시키기 위한 것이다. 전원 풍경은 이른 봄이라서 그런지 아주 조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