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박소율

비오는 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침이다. 침대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창문으로 비쳐 오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세수하고 학교를 가는 어렵지도 않게 했던 일상의 루틴들이 오늘 따라 더 버겁게 느껴졌다. 너무 밝게 빛나는 아침 햇살이 나의 정신을 지배했고 생각과 의지가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밀려오는 학업과 불편한 친구들을 학교에서 마주하는 것이 나의 힘듦에 대한 이유겠지만 어두운 곳 하나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모든 것을 모조리 비추는 밝은 햇살이 원망스러웠다.

교실에 들어섰다. 햇살은 아침보다 더 밝고 찬란했다. 아이들은 무언가 잔뜩 기대한 얼굴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이런 날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라는 결심 가득한 수다들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이런 화창한 날에 조용히 보내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것 같은 분위기가 나를 더 짓누르는 것 같았다. 환한 햇살은 어디로든 숨어서 조용히 있고 싶은 내 마음이 나를 패배자로 만드는 것 같았다. 화창한 햇살이 더욱 미워졌다.

오후 3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도 햇살은 수그러 들 기미가 없었다. 햇빛은 여전히 눈부셨지만 나에게는 해야할 과제들이 산더미였다. 도무지 책상 앞에 앉고 싶지 않았지만 책상에 앉아있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순간순간들의 짜증이 말라버린 먼지처럼 나에게 붙어있었다. 그 감정들을 씻어내고 싶었으나, 여전히 밖은 너무 밝았다. 제 정신을 차리기에는 밖이 너무 환했다. 나는 나와 내 감정들을 그냥 소파에 내팽개쳐 버렸다.

절대로 흐려지지 않을 것 같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마철 세찬 빗줄기도, 한여름의 소나기도 아니었다. 가늘고 여린 빗줄기들이 보슬보슬 땅을 적시기 시작했다. 빗줄기들은 태양아래 뜨겁게 달궈진 땅을 식히며 나를 깨웠다. 나는 밖을 걷고 싶어졌다. 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가니, 빗줄기와 어느 새 시원해진 공기가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반나절 동안 뜨거운 햇살아래에 타들어갔던 내 감정들이 촉촉해졌다. 빗물을 먹은 잔디와 땅은 훨씬 부드러워졌고 날아다니던 것들은 착 가라앉았다. 하늘로 향하고 있었던 것들이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향하는 것이 주는 안정감이 나를 진정시켰고 빗줄기의 차가움이 나를 이성적으로 만들었다. 빗속을 걷는다는 건 나를 정신차리게 해주는 일이었다. 빗줄기가 더 없이 반가웠다. 내 짜증은 어느새 씻겨가고 있었다.

내 짜증의 근원이 친구들과 감정을 끌어올려 노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하루하루 꽉 찬 일상의 과제들로 인한 긴장과 불안감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또한 그 불편한 감정들이 고작해야 날씨로 탓을 돌리며 일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내 나약한 모습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밴쿠버의 긴 우기는 이런 감정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해준다. 긴긴 밤에 몇 날 몇일 내리는 비는 나를 들뜨지 않게 만들며, 조용함에 적응할 수 있게 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며, 비로소 나를 각성시킨다. 벤쿠버 여름이 반짝이고 아름다운 이유는 기나긴 비의 시간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찬란한 나의 한 때를 꿈꾸며 나는 오늘도 비오는 날을 기다린다. 그래서 나는 비오는 벤쿠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