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한 의료 시스템이 한계로 몰아”
밴쿠버에서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케이틀린 스톡턴 박사는 소음으로 가득 찬 응급실 한복판에서 사생활도 보호받지 못한 채 방금 처음 만난 환자에게 암 진단을 내려야 했다. 복도에 멈춰 선 구급차 스트레처 위에서 뇌출혈 환자를 치료해야 했고, 대기실에서 8시간을 기다리다 치명적인 패혈성 쇼크에 빠졌던 환자의 기억은 아직도 그녀의 잔상을 괴롭힌다.
스톡턴 박사는 이러한 참담한 경험들이 의사들을 마모시키고 있으며, 지난 몇 년 동안에만 동료 의사 최소 5명이 응급실을 떠났다고 했다.
캐나다의학협회저널에 게재된 전국 단위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문제는 특정 병원이나 일부 주에 국한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응급의학과 의사 10명 중 1명이 전공 분야를 완전히 떠났으며, 대다수의 의사들은 번아웃을 감당하기 위해 진료 시간을 줄이거나 휴직을 선택하고 있다.
2025년 전국 응급의학과 의사 수 백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이번 연구에서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49%)가 진료 시간을 줄였다고 답했다. 20%는 휴직 경험이 있었으며, 10%는 응급의학과를 완전히 떠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여성 의사와 젊은 의사층에서 번아웃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의사들의 심각한 번아웃이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와 환자 안전 위협으로 이어지며, 이를 단순한 ‘팬데믹 일시 현상’ 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현재 캐나다 응급의학과 의사는 계약직 형태가 많아 정확한 전체 인력 통계는 없으나, 캐나다보건정보연구소는 2024년 기준 약 3,750명, 캐나다응급의학과의사회는 약 6,0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스톡턴 박사는 “전국적으로 보건 의료 인력이 무더기로 이탈하는 경악스러운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며 “이들은 은퇴를 앞둔 이들이 아니라, 졸업 후 3년, 5년, 10년밖에 되지 않은 젊은 의사들이다. 더 이상 개인의 삶과 건강을 유지하며 이 일을 버텨낼 수 없기 때문에 응급실과 병원을 떠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시스템 붕괴가 초래한 국가적 위기
응급의학과 연구진은 의사들의 이탈을 “캐나다 보건 의료 시스템의 심각한 위기”로 규정했다. 수 백만 명의 캐나다인이 주치의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응급실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과밀화에 시달리고 있다.
2024년 온주에서는 응급실을 갖춘 병원 5곳 중 1곳이 예상치 못한 일시 폐쇄를 겪었으며, 2024-2025년 입원 환자의 10%는 응급실에서 48시간 이상 대기해야 했다. 이는 6년 전보다 12시간이나 늘어난 수치다.
응급의학과 제임스 마스칼릭 박사는 “의사들이 직업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조직 및 시스템적 문제”라며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의사들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이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의료 기관이 노인 전용 응급 치료 시스템에 투자하고 응급실 외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온주가 약사와 응급구조사의 진료 권한을 확대하고, BC주가 긴급진료센터를 확충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캐나다 13개 주 및 자치구 총리들은 연방정부에 예측 가능한 보건 의료 기금 증액을 촉구했다. 캐나다의학협회 역시 주 총리들에게 응급실 연쇄 폐쇄 등 병원 대란을 해결하기 위해 주 경계를 넘어서는 의료진의 유연한 근무 환경 조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동료 지원 프로그램이나 개인적 휴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응급실 현장을 사지로 내모는 근본적인 의료 시스템 재편만이 의사들의 이탈을 막을 수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