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에피소드: 그리운 아버지~)
언제부터인지 창 밖을 바라보는 여유로움은 기성세대만의 몫인 것처럼 아이들에게는 낯선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주변의 세상을 살피며 살아가기를 권고하는 부모들도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스마트 기기를 손에 넣은 아이들은 그 기계속에서 마주하는 세상에 열광하고, 익숙해져 가기에 아이들과 어른들의 세상 살이는 그렇게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다. 이 모든 소원함은 부모의 사랑을 자녀들이 가볍게 여기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요즈음은 몇 달 전 저 세상으로 떠나신 친정 아버지가 몹시나 그립다.
1990년 초에 청소년 시기를 보낸 나 또한 그 시절 인기가수에게 열광했고, 홍콩 인기 배우에게 푹 빠져 그와 관계된 모든 것들을 수집하는 등 요즘 청소년처럼 보낸 적이 있다. 어쩜, 지금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습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보수적이고 사업에 바쁘셨던 친정 아버지는 막내 딸인 나에게만 유독 관대하셨다는 기억이 요사이 자주 떠 오른다. 어느 가정이나 슬픈 사연을 한 가지씩은 갖고 있다. 우리 가정 또한 그러하였다. 그래서 20대가 되어 가정을 이루었던 나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미워한 적도 있다. 병상에 오래 누워 계시는 기간에는 감당해야 할 여러 문제로 아버지를 더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 묵은 감정을 다 정리하지 못한 채 아버지와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 시간부터 떠오르는 내 기억은 그에게 넘치게 받았던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만이 떠 오르니 참으로 괴롭기도 하다.
홈스테이 엄마로서 생활하는 내가 어떤 이유에서 내 아비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내 기억을 거슬러 풀어 놓고 싶은 이야기는 내 친정 아버지의 훈육 모습을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성향의 아버지들이 많았던 그 시절,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실 때에는 과일이나 먹을 것이 담긴 봉지를 꼭 들고 집에 오셨다. 대부분의 성인 남자들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니는 것을 꺼리던 모습이었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고 일어날 때마다 이불을 펴고 개키는 일은 아버지가 항상 하셨던 기억도 있다. 당신이 만나는 거래처 사람들과의 교제 때에도 종종 데려가시며 옆 자리에 앉아 요쿠르트를 마시던 기억도 즐겁다. 국수 공장을 크게 운영하셨던 아버지는 사람들을 많이도 좋아하셨다. 먹이고 입히고 돕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어렸을 때나 어느정도 성장한 딸을 위해 학교에 오시는 것을 피하지 않으셨던 기억도 나에게는 듬직한 기댐이었다. 오죽하면,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했을 때에도 기숙사로 전화를 제일 많이 하셨던 유난스러운 아버지로 사감실에서는 기억을 하신다.
뭐든지 다 들어주고 해 주려고 하셨던 아버지임을 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자식이 되면 모두가 이렇게 이기적인 것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무엇이든 받아주시는 아버지도 한 가지에서는 엄하셨다. 복장과 귀가 시간이다. 교복을 입던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주말이 되면 친구들과의 약속을 위해 예쁘게 차려입고 외출을 한다. 짧은 치마나 민소매의 옷이라도 입고 나가려 하면 그 날은 외출을 하기 어려운 날이다.
또 어떤 날에는 재미나게 놀다가 귀가하면 아버지는 큰 종이와 펜을 주시고 내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기록하여 보여드려야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한참 외모에 관심이 많고 놀고 싶은 때였던 나는 아버지의 훈육 덕분에 그 흔한 미팅 한번 하지 못 하였고, 클럽 한 번 가지 못 한, 보여지기만 모범생이 되었다. 어쩜, 이 한가지 쉽지 않은 모습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많았던 것 같다. 그 때는 그렇게 받는 감사함보다 불편한 한 가지가 몸서리치게 싫었던 청춘이었다..
현재, 나는 크고 작은 아이들을 여러 명 보호하고 있다.
지금의 아이들도 내 젊은 시절처럼 나를 이해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들어주고 함께 하고 이해하지만, 귀가 시간과 이성교제 문제만은 쉽게 지나치지 않는 내가 아이들은 미울 수도 있다.
내가 그랬듯이 우리 아이들도 불평일 것을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지금 꼭 지켜야 하는 한 가지를 익혀 두는 것은 절대 후회되지 않은 과정인 것을 아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기대도 해 본다.
나의 아비처럼 온전히 자식에게 주려고만 했던 그 마음과 내 이익보다 다른 이에게 나누는 마음이 커서 가족이 조금은 궁핍했을 때가 있었을 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교육인 것이었다.
성탄절이 되면, 고등학생때까지 머리맡에 용돈과 메모, 공중전화 카드를 놓아주셨던 멋진 산타클로스가 우리들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인 것을 아이들이 기억해 주기를 부탁하여 본다. 시간이 다시 돌아가지 않듯이 우리들의 부모님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시간도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는 것도 잊지 않기를 바라여 본다.
이 글을 공유한 젊은이들이 있다면, 지금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 감사하다”라고 전해 보길 희망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 일상이 행복입니다)
얼마 전 만남을 가진 지인에게서 “언제 가장 행복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았다. 잠시 몇 초간을 멈칫하게 되었다. ‘언제일까?……’ 나는 정확한 답을 못 찾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에게 행복은 자식과 연관된 것 외에 크게 없었던 것 같다. 20대의학생에 결혼을 하여 앞만 보고 경제활동과 육아를 하며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남편과 나는 성실히 살아왔다. ‘행복’이라는 친근하지만 특별한 단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이 아이들에게 “행복해야 한다”라고 가르친 것이다.
나에게 질문을 하신 분은 남편의 배를 베고 음악을 들으며 있을 때가 행복하다고 하셨다.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우리 가정이 온전하게 함께 지낼 수 있는 모습, 아들이 부모에게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들려주는 그 때,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보금자리와 일용할 식사가 있는 것, 길 가다 도움이 필요한 노숙자에게 흥쾌이 나눌 수 있는 여유, 그리고 지금도 나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는 값진 지인들이 있고 나도 그리할 수 있는 이 모든 삶이 행복인 것을 우리는 많이도 잊고 사는 것 같다. 우리는 부모이기에 자녀들에게도 특별한 행복이 아닌, 지내는 모든 순간이 행복인 것을 느끼게 할 책임은 있는 것이다. 부모이기에~~
Ps; 한국 부촌의 자동차 매장에서 젊은 부인과 4-5살 된 아들이 외제 자동차를 고르는 모습을 젊은이가 보았다. 버스 안에서 잠시 정차시에 본 이 모습에도 갓 20대가 된 학생은 생각하였단다.
‘저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니 부모님이 가진 자이구나…그래서 저 아이를 더욱 잘 키워야겠구나!
나는 부모님이 주신 재산이 아니라, 교육과 재능으로 내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고, 부유한 사람들의 능력 또한 인정하며 부정적이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평정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겠구나! 이 사회가 지닌 계층간의 부조화가 줄어들기 위해서 우리 젊은이들이 정말 의미있게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SNS상에서 나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보낸 아이는 소소한 일상에서 갖는 생각이었지만, 이 시대 젊은이들의 작은 생각들이 모인다면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긍정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