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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있는 에세이 (4) 생활이 그대를

2019-07-26 00:00:00

생활이 그대를/속일지라도/맘껏 슬퍼하고/노여워하라/남자여//뼈 속 깊이/삶의 고뇌가 스며들어/왼 밤 잠 못 이룬다면/그냥 깨어/함께 고뇌와 뒹굴라/남자여//여명이 밝으면/밀물처럼/새로운 고뇌가 그대 발부터 적시리니/남자여/남자가 어찌 하는 알량한/자존심 버리고//때론 여자처럼 감정을 보이며/엉엉 울고 앙탈도 부려보자//그리고 아침 해 뜨면 부지런히/쟁기 메고 밭 갈러 가라//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활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 번 쯤은 읊어 본 러시아 시인 푸슈킨(알렉산드로 세르게예비치 푸슈킨: 1799년 출생, 1837년 사망)의 시 구절 중 하나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으로 잠 못 이룰 때 시인은 이렇게 속삭였다.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머잖은 날 기쁨이 찾아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니.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는 것. 지나간 것은 항상 그리워지는 것이리니’

기억하시는지. 여러분들은. 젊은 시절은 항상 쉬 이루어질 수 없는 꿈들에 대한 도전과 갈등으로 차 있었고, 한 고개를 넘으면 또 한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고개 마루에 올라 지나온 길 되짚어 보면 후회만 남고, 앞 보면 갈 길 아득했던 시절. 그러나 삶은 머무를 수 없기에 다시 기운 내어 갈 길 재촉하던 나날들.
그리하여 우리들은 밴쿠버까지 왔고 그것으로 방랑은 끝일 줄 알았지만 더 험한 고개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한 숨 내 쉬던 하루하루. 그것이 삶이 아닌가? 그래서 현재는 언제나 슬프다고 시인은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시인은 어떤 삶을 살았던가? 교양 있지만 가난한 러시아 귀족 집안의 후예로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차르스코예 셀로에 귀족학원인 리세에서 공부하여 성 페테르부르크의 외무부 관리로까지 발탁되었지만 사회개혁에 대한 깊은 관심과 급진적 문학성향 때문에 시골 영지로 좌천되었었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쓰면서 국민작가의 칭호를 받으며 그의 문학적 지위를 확고히 다졌었다.
그러나 당시의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사교생활에 깊이 빠져 들었으며 1831년 사교계의 빼어난 미인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운명적인 결혼을 하였지만 자신의 복잡한 애정행각과 아내의 무모한 사교생활로 엄청난 빚을 져 파산지경에 이르렀고,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스캔들로 인해 연적과 결투를 하게 되었는데 복부에 치명상을 입고 1837년 사망하게 되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던 시인도 아내의 바람기 앞에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사람은 지극한 슬픔으로 충격을 받았을 때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해진다. 그리고는 울기 시작한다. 정신과 의사에 의하면 이때 마음껏 울지 못하면 가슴에 병을 얻어 몸을 상하게 된다고 한다. 울 만큼 울게 되면 마음을 추스르고 남은 삶을 이어나갈 기운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통계학적으로 보면 잘 우는 여자가 잘 못 우는 남자보다 슬픈 충격에서 빨리 벗어난다고 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현실감각에 대한 인식이 더 빠른 측면도 있지만 가슴 속에 있는 한을 통곡과 눈물로 확 쏟아내 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지 싶다.
예컨대 남편을 일찍 여읜 미망인은 남은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남편을 가슴에 묻은 채 열심히 생활전선을 헤쳐 가지만 그 반대인 홀아비의 경우 좀 더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울어야 할 감정을 가슴에만 묻어 두다가 그냥 그것이 병이 되어 바로 아내를 따라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민자의 삶도 비슷하다. 여생을 건강하게 보내려면 현재의 삶이 아무리 잘 풀리지 않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깡소주에 오징어다리 씹으면서 신세타령만 할 것이 아니다. 남자도 좀 울면 어떤가. 울만큼 울면 다시 털고 일어서면 된다.
어차피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프지만 모든 것은 순간’이라고 했으니 백수들이여 장노(장기간 노는 사람)들이여 한번 기차게 울고는 다시 털고 일어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