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어머니 그리고 교회 청지기회 어머님들

2025-07-17 11:17:53

2020년 1월 1일 새날이 밝았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 후에는 날씨가 너무 좋아 본 교회에 이날까지 모시고 다니시던 청지기 어머님들께서 한 분 한 분 다 떠나시고 이제 남아계신 두 분을 오늘도 각각 집에까지 모셔다드렸다.

설날이라고 옷도 곱게 입으시고 오셨기에 사진도 찍어드리고 안아 드리며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시던 모습을 뒤로하고 오면서 제가 교회 어머니들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였다. 그리고 저의 어머님의 생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일찍 하늘나라에 먼저가신 어머님을 그리워했다. 제가 군대에 입대하기 전 어느 여름 주일날 낮에 동네 앞 교회마당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을 때 저의 어머님께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시면서 어머님 친구분들에게 내 아들이라고 자랑을 하시더니 “영승아 이제 네가 너에 새가정을 이루거든 너만이라도 교회에 나가는 생활을 하거라” 하신 말씀을 잊고 살아왔다.

캐나다에 와서 저를 이곳으로 오게 해 주신 분을 따라서 교회에 나오면서 부터, 나는 어머님의 유언처럼 이제야 이루어지는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라 교회 어머님들께 고백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렸다. “하늘 나라에 가신 어머님께 효도를 못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제 불효를 용서받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제부터 제가 힘 닿는 한 어머니들을 모시고 다니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15인승 VAN을 준비하여 공장에서 다목적용으로 탈 수 있게 개조하고 4급 면허증도 발급받아서 어머님들을 모셨다. 때로는 교회 여러 집사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어머니들을 모셔온 세월이 어느덧 40여년이 되었다. 먼 훗날 교회 어머님들께서 하늘나라에 가셔서 우리 어머님(성산 배씨, 배 성심) 어머님을 뵙게 되시거든(사초리 동쪽 작은 동네 (양철) 영승)이라고 말하면 금방 알아들을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해남군 북평면에 예수 장로교회 교회를 돌보시는 외가집 가정에서 유교를 숭상하는 종가집 맏며느리로 시집오셔서 매달 모시는 조상님들의 제수를 준비하시느라 오일장 오십리길을 머리품으로 다니시면서 힘들게 사셨다.

어린시절 어느 여름 초저녁 달 밝은 밤에 식사 후 어머니께서 나에 손을 잡고 마을 방파재 뚝길로 산책을 나가시니 동네 분들이 모깃불가에서 서로 담소하시다가 어머니를 보시고는 모두 반쯤 일어 서면서 “아이고! 아짐씨! 어째 안주무시고 이렇게 나오셨습니까요?” 하시니 어머님께서 “두 세상 살아보려고 나왔지요”하시며 그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지나가셨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가면서 “엄마! 엄마! 저 넓은 바다 아래 저 아래 밑에는 지금 해가 떠 있고 거기에는 미국이라는 다른 나라가 있다고 하데요” 하면서 조잘대는 나의 재롱이 귀여우셨던지 어머니는 “무슨그런 세상이 다 있다냐?” 하셨다.

나는 “엄마 나 이담에 크면 그런데 가서 살아보고싶어!” 하니 “아이고!,그럼 나는 죽어서나 가볼 거나!” 하시며 나에 재롱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렇게 막연하게 조잘대던 나의 철없이 말하던 그 소원을 들어주시고 나를 이곳까지 보내주신 우리 어머님 마음 속에 모셔져 있는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도 계셔서 역사해주신 것이라는 것을 늦게 나마 깨달았습니다. 그때 우리 어머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지구 반대편 캐나다에 와서 어머니의 그 마음과 함께 살아가면서 교회 어머니들을 정성으로 모시며 교회에 다녔었다. 그 후 이날까지 35년이 넘도록 어머님들을 모시고 다니는 동안 한 분 떠나시고 작은 수의 어머님들께서 지금도 정정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시는 청지기회 어머님들께서 교회 앞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만 보아도 모든 교우들 께서는 각자의 믿음 생활을 다시 한번 스스로 점검해 보며 옷깃을 여미기도 합니다.

글 사진 양영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