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피로는 점점 구조적인 문제로 드러난다.
많은 이들이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자주 만나는 일상은 비일비재 해졌고 죄책감 없는 태도가 일상이 되는 일도 흔한 세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하나의 공통된 체감이 있는 것 같다.
나르시시즘과 반사회적 성향이 더 이상 예외적 성격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화되는 성향이 되었다는 감각이다.
이 글은 특정 개인을 진단하거나 낙인 찍기 위한 목적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현대 사회가 어떤 인간 유형을 보상하고, 어떤 인간성을 소모시키는지 냉정하게 바라보기 위한 시도로 알아주면 좋을 듯하다.
1. 우리는 정말 문제적 인간이 늘어난 사회에 살고 있는가?
임상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자기중심적 행동이 나르시시즘은 아니며 모든 공감 결핍이 소시오패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있다.
현대 사회는 나르시시즘적 태도와 소시오패스적 전략을 매우 효율적인 생존 기술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타인의 감정보다 자기 이미지 관리가 중요한 환경, 관계보다 성과와 노출이 우선되는 구조, 책임보다 회피가 합리화되는 시스템.
이런 조건 속에서 공감은 경쟁력이 되기 어렵고, 양심은 종종 손해로 계산되고 있다.
2. 나르시스트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된다.
우리는 흔히 나르시스트를 과도한 자기애를 가진 문제적 인물로 상상한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나르시시즘은 병리라기보다 환경 적응형 성격이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말한다.
너 자신을 브랜딩하라.
보여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감정은 관리 대상이지, 공유 대상이 아니다.
이 메시지들 속에서 자아는 관계 안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자아는 타인의 반응으로 평가받는 상품이 된다.
그 결과, 자존감은 내면에서 형성되지 않고 외부 인정에 의존하는 취약한 구조로 고착된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공감 없는 자기확장, 비판에 과민한 방어, 타인을 도구화하는 태도이다.
우리가 나르시스트라 부르는 모습의 상당수는, 사실 불안정한 자아의 방어 양식인 것이다.
3. 소시오패스적 태도는 왜 유능함으로 오인되는가?
더 불편한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소시오패스적 특성은 종종 리더십, 결단력, 냉정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죄책감 없이 결정을 내리는 사람, 타인의 고통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끌지 않는 사람.
이들은 위기 상황에서 더 효율적인 결과를 이어갈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효율적인 인간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반복적으로 보상될 때 발생한다는 부분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공감이 없는 능력은, 결국 타인의 소모를 전제로 하고, 소시오패스적 성향은 단기간의 성과를 만든다.
그러나 그 비용은 늘 타인에게 전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침묵, 자기 의심, 관계 붕괴, 그리고 번아웃.
이 모든 것은 누군가의 냉정한 성공 뒤편에 남겨진 잔해가 되는 것이다.
4. 가장 많이 소모되는 사람들
이 구조 속에서 가장 큰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은 명확하다.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이며 책임을 내면화 하는 사람, 관계를 쉽게 끊지 못하는 사람, 자신이 더 이해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이들은 종종 나르시스트와 소시오패스의 곁에 오래 머물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유는, 그들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쪽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냉정한 진실이 있다.
공감은 상호적일 때만 미덕인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실수와 일방적인 공감은 착취가 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무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5.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것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는 과잉 도덕도 타인을 전부 의심하는 냉소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구분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인지 설득이 아닌 경계 설정이 필요한 상황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해가 아니라 거리두기가 성숙한 선택인지를……,
건강한 사회는 공감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감할 수 없는 관계에서 물러날 자유를 인정한다는 성숙한 자세이다.
글을 맺으며, 나는 나르시스트와 소시오패스가 많아진 사회라기보다,
그들이 더 잘 작동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구조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다.
모든 관계를 유지할 책임은 우리에게 없다.
이해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관계의 선택권을 되찾는 것, 그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심리적 성숙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