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9월 9일 WednesdayContact Us

떠난 뒤 보이는 것 / 정효봉

2026-09-09 08:26:55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적막한 거실에서 나는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이 아른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모두 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덤덤하게 가라앉은 집 안 분위기에 나 역시 조금씩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늘 바빠 얼굴조차 마주하기 힘든 딸아이의 기척만이 간간이 그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그렇게 텅 비어 있던 고요한 공간에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딸아이의 결혼식을 앞두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순식간에 집 안은 시끌벅적해졌다. 다국적 기업의 한국지사에서 근무하는 아들은 약혼자의 손을 잡고 휴가차 날아왔고, 직장 생활을 하며 혼자만의 삶을 즐기던 어여쁜 조카도 한걸음에 달려왔다. 단 며칠 만에 우리 집은 완벽한 ‘풀하우스’가 되었다. 현관에는 신발이 겹겹이 쌓였고, 거실에는 사람의 온기와 웃음소리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나누던 따뜻한 밥 한 끼,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어지던 수다, 밴쿠버 근교 맛집을 누비며 왁자지껄 떠들던 나들이까지. 각자 저마다 일상에 매여 바삐 살아가느라 만나지 못했던 시간의 공백은 그 며칠 사이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 채워졌다. 우리는 다시 하나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참 깊고 환하게 웃었다.
결혼식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 행복한 모임은 딸아이의 결혼식 날 절정에 달했다.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이 순간을 준비해 온 딸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축제의 날이었다. 한국의 정형화된 예식과 달리, 신랑 신부 둘의 이야기를 담아 자유롭고 유쾌하게 진행된 결혼식은 마치 한 편의 감동적인 뮤지컬을 보는 듯했다. 식장을 찾은 많은 하객과 우리 가족 모두에게 즐거움과 감동의 눈물이 어우러진 특별한 잔치였다. 환한 웃음에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아빠 손을 꼭 잡은 채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딸을 바라보는 순간, 행복감과 함께 감출 수 없는 벅찬 뭉클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작고 여린 아기를 품에 안았던 순간부터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제 짝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지금까지, 딸아이와 함께했던 지난 세월이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감추려고 애써 보았지만,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끝내 참을 수 없었다. ‘아빠라서 어쩔 수 없는 마음이야.’ 나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자식의 홀로서기 앞에 한없이 약해지는 마음이었지만, 그 순간 한자리에 모인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나를 더없이 든든하게 지탱해 주었다. 그 순간 난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했었다.
즐거운 잔치가 끝나자, 시간은 어김없이 이별을 독촉했다. 식이 끝나기 무섭게 가족들은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고,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신랑을 따라 새로운 보금자리로 떠난 딸아이를 시작으로, 아들과 예비 며느리도 한국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조카를 배웅하기 위해 찾아간 공항. 활주로 너머로 비행기가 떠오르고 그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가슴 한쪽이 아릿하게 허물어지며 깊은 적막이 감돌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바라본 창밖 풍경은 그대로였지만, 집으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쓸쓸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꽉 차 있던 거실에 들어서자, 썰물이 진 바다처럼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꺼져 내렸다. 온기로 가득했던 방은 썰렁하게 남았고, 한바탕 북적임 뒤에 찾아온 정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헛헛했다.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등을 토닥여주고 힘껏 안아주었던 그 감촉은 아직도 잔상처럼 남아 마음을 흔들었다.
그 허전함을 가만히 달래며 나 자신에게 물었다. ‘가족이란 과연 늘 같은 공간에 모여 살아야만 완성되는 것일까?’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한국에서,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일구어가고 있다.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내 가족들이다. 멀리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하고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다가, 인생의 소중한 마디마다 기꺼이 한자리에 모여 기쁨을 나누는 것. 매일 얼굴을 마주하지 못해도, 서로 다른 나라에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고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어준다. 곁에 없어도 서운하지 않은 이유, 잠시 모였다가 헤어져도 다시 힘을 얻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가족’이라는 튼튼한 닻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완성하는 것은 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누는 사랑이다. 어쩌면 이런 강력한 ‘사랑의 뭉침’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일 것이다.
파도가 지나간 뒤 고요해진 바닷가처럼 다시 정적에 싸인 우리 집. 하지만 나는 이제 쓸쓸해하지 않는다. 함께했던 시간의 따스한 온기와 다시 만날 날에 대한 설렘이 가슴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번에 더 따뜻하게 뭉칠 우리 가족의 또 다른 축제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 떠난 뒤에야 비로소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빈자리를 채우며 더욱 크게 다가오는 ‘가족’, 그리고 그 아득한 거리마저 따스하게 이어주는 ‘사랑’이다. 가족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