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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있는 사랑

2017-11-30 00:00:00

11월이 끝나가는 이맘때면,언제나 들떠 있는 우리 아이들~
12월 방학이 되어 아이들은 각자 스케줄에 따라 한국을 방문하곤한다.이번 방학에도 고향에 다녀 올 세 아이들. 이 곳에서 8년 가깝게 살았음에도 한국 만큼 놀거리와 만날 사람들이 다양한 곳도 없을 테니…얼마나 설레일지 이해가 되는 바이다. 저마다 각자 상태 메시지에는 D-day를 표시하고 이모티콘으로 표현을 하는 아이들~참 예쁜 시절이다.
 
6년 전이었다.
아이들과 2년이 다 되어가던 유학 생활 중에 한국을 방문하게 된 우리 여덟명은 오랜만에 고향 방문에 마냥 즐거웠고,아이들 또한 어린 시절중 2년이라는 시간동안 부모님의부재 후 가족을 만났으니 행복한 시간만을 보냈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보름이라는 시간을 각자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고 밴쿠버로 돌아오는 날아이들과의 만남은 어찌나 어색하고 낯설던지…눈물이 ‘핑’ 도는 그날이었다.
 
지난 2년 가까이 한 솥밥을 먹으며 매 순간 함께하고 소소한 추억 거리도 항상 공유하며 지냈던 우리들. 한 아이는 이 곳에 오기 전 동생이 있다는 이유로 큰 아이 역할을 해야 했기에 부모와의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낼 수 없었고, 또 다른 아이는 오빠를 유난히도 귀히 여기던 가정이었기에 엄마에게 불만이 가득한 딸이었다. 이런 까칠이들을 안아 주고 사랑한다하며 손발톱도 직접 깎아주고, 무릎에 눕혀 귀 청소로 간질거리던 그런 일들은 모두가 내게는 소중한 가정의 추억놀이였다.
그런 내 아이들이 이제는 각자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팔을 꼭 붙들고 울먹였던 모습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멍’할 수 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여기에 설상가상 엄마에게 불만이 가득했던 우리 집 막둥이는, 신종플루에 걸려 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혼자 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아이를 부탁하시니 아이도 힘들고 나 또한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이럴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다른 부모님들이 알게 되면 불쾌할 수도 있었고, 다른 아이에게 전염이라도 된다면 막둥이가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현실이었다. 완쾌가 되지 않은 상태여서 장시간의 비행이 무리가 될 순 있었지만… 그 시간 내가 공항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은 없었던 것 같다. 제일 큰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 한 후동생들을 인솔하게 하고, 난 막둥이를 챙겼다.
 
비행기 안에서 끙끙 앓던 아이를 10시간이 넘게 온 몸을 주무르며 함께 울고 다독이며 보냈던 그날. 밴쿠버에 돌아오고 나서도 집 안에서는 나와 막둥이가 같은 방을 사용하며 약을 먹이고 간호했던 첫 한국 방문 후의 경험은 힘듦이었다. 일주일쯤이 지났을 때 아이의 건강은 조금씩 회복이 되었고 다행이도 아픈 아이 하나 없었기에 여분으로 가져 온 타미플루는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던 2012년 봄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렇게 모든게 제 자리를 찾은 줄 알았고, 엄마를 그리워하던 두 아가씨들의 방황도 함께 끝난 줄 알았다. 15일간의 한국 일정에 아이돌 가수들에 흠뻑 빠져 돌아 온 두 아이는 잘 적응하던 이 곳 생활은 잊은 듯, 한국으로 돌아가 아이돌 가수가 되겠다며 우왁스럽지 않은 일탈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귀엽게 보이다가 시간이 길어지니 당황이 되었고 그 보다 더 지나니 내 마음엔 구멍을 뚫렸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내가 가자고 한 유학도 아니고,경제적인 이득이 큰 것도 아니었던 일상들이 후회스러웠기에 그만 하고 싶은 감정만 커지기 시작하였다.
많이도 의지하고 사랑했나보다.
보통의 사람들도 잘 지내다가 상대방이 외면했을 때 이렇게까지 아픈 것인지, 도대체 나의 감정은 아이들에게 어디까지 미쳤던 것일까? 소녀 둘이 똘똘 뭉쳐 한편이 되고, 나를 적으로 몰아 세우며 지쳐가던 2개월쯤이었을까?
점점 아이들의 방황은 수그러들어 작아졌고,‘정’이라는 우리들의 무기는 아픔도 잊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
 
아이들 모두가 부모가 그리운것이라면…
내 아이 건형이만 빼고는 모두 앓았을 향수병이었을텐데…
 
두 아이에게만 심하게 찾아 온 이 열병은 분명히 같은 원인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 지내며 자식으로 소중히 여겨졌던 건 사실이겠지만, 두 아이는 어머니에게 오빠와 동생이라는 존재에 사랑을 나눠야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불만 가득한 마음으로 2년을 떨어져 지내다 다시 만난 엄마들은 그 전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온전히 함께 하였고, 안아주고 사랑한다는 표현도 많이 듣게 된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니 참으로 따뜻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시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웃을 수 있지만, 두 아이가 형제들과 골고루 사랑을 나눠 받았다면 만남도 헤어짐도 순조롭게 받아 들이는 기쁜 기억만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아이들을 길게 데리고 있다보니, 부모님께서 잠시라도 방문 하여 함께 머무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에도 조용히 지나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부모님과 함께가 되면 아이들에게는 이상한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스스로 잘 챙기며 지내던 아이도 아기가 되어버리는 힘이 생기고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힘도 생기는 어리광이들이 되는 것이다. 곁에 있는 친구나 동생들이 보이지 않는 그 순간에 남은 아이들이 쓸쓸해 지는 건 당연한 것이다. 언제든 부모님을 환영하던 우리 가정도 상처입는 아이들을 보며 다시한번 생각을 하게 된다. 올 여름, 조카 아이 또한 부모님의 방문에 마냥 아기가 되어 지내게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상실감에 빠진 조카 아이와도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생기게 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부모님의 방문에 들뜨게만 되지 않게 되는 현실이 되었다. 그 감정들을 이해하고 다독이는 것에도 마음이 참 힘들기 때문이다.
 
딱 한 번 있었다. 부모님이 오셨음에도 중심을 잘 잡던 아이, 우리 집 큰 언니(누나)였다. 우리에게도 한국의 부모님에게도 골고루 마음을 쏟고, 동생들에 조차 부족하지 않는 위치를 잡아 주었던 큰 아이. 외동이기에 온 가족의 사랑을 전부 받아왔고, 이 곳에서는 큰 아이라는 책임감에 조화를 익힌 아이는 분명히 사랑을 주고 받을 줄 아는 성인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내가 전하고자 했던 마음은 나눔이다.
가정에서부터 균형 있는 사랑의 받음은 세상에 나아가 사랑을 효과적으로 나눌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열매가 되는 것이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은 나눔은 사랑인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모든 부모님들이 살아감에 여유가 없다하여도 내 아이들에게 건강한 사랑을 보여 준다면 이 보다 더 값진 교육은 없지 않을까 생각하며~~나와 살아 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얼마 전, “엄마,오래 살아. 내가 한국 엄마와는 또 다르게 엄마를 사랑하는거 알지?”라며 나를 꼭 안아주던 아이의 말에 힘이 되는 요즈음이기도 하다.
 
-JNJ 홈스쿨 원장(www.canbce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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