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그들

2024-11-07 11:00:31

글 이원배 늘푸른 장년회장

‘젊은 그들.’ 일제시대인 1930년과 1931년 사이에 연재된 김동인의 장편소설 제목이다.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선말기. 쓰러져가는 조선을 살리기 위해 투쟁하다 불꽃같이 사라져간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나라가 망하는 줄 모르고 제 밥그릇 챙기느라 부정부패에 열중하던 기성세대. 그리하여 삼천리 금수강산은 이웃나라에 먹혀 버리고, 분연히 떨쳐 나선 젊음은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 젊은 기개는 후일 독립운동정신의 기초가 되었다.

밴쿠버 한인사회. 1960년대말 선각자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구어 온 한인사회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전투구의 무대가 되어버렸고, 지각 있는 한인들은 등을 돌렸다. 선배이민자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마련한 한인회관을 한인이 들어가 부수고, 고장내고, 절단 내었다. 참 부끄러운 시대를 겪었다.

그러나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오는 법. 시간은 감투싸움에 혈안이던 고목(古木)같은 사람들을 차츰 사라지게 하고, 그 자리를 ‘젊은 그들’이 채우면서 밴쿠버 교민사회는 차츰 서광이 비쳐오는 듯하다. 거기 더하여 2024년 10월 19일 끝난 주의원(MLA) 선거에서 최병하(영어명 폴최)가 당선되어 더욱 한인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옆에서 지켜본 연장자로서 감개무량하다.

폴 최는 밴쿠버 언론기관의 인터뷰에서 ‘당선되면 한인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주 의원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할까’ 냉소하는 사람도 있다. 모르는 소리다. 대단한 권력을 가져서 가 아니다. 주의원은 한국의 국회의원처럼 무소불위(無所不爲)가 아니다. 게다가 초선의원이니 주정부를 좌지우지해서 한인사회에 큰 혜택을 가져가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다. 내가 폴 최를 추천한 대만계 주 의원 앤 캉(Anne Kang)을 버나비 시의원일때 알아왔다. 그녀의 선거구에서 15년간 살았었고, 그녀가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인연으로 그녀의 선거운동도 도운 적 있고, 행사때마다 초청하고, 그녀의 행사에도 빈번하게 참석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행사가 아닌 곳에서는 항상 ‘물 떠난 고기(A fish out of water)’처럼 기운이 빠졌다. 예컨대 춘절(한국의 설날)행사에 초청받아 메트로타운 지역사무실에 가 보면 80프로 이상이 대만계 사람이고, 나머지는 비 대만계인데, 한인이래야 고작 대여섯명 내외. 맥이 빠져 인사만 하고 쓸쓸히 행사장을 빠져나오기 일수였다.

그래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버나비 로히드지역에서 선출된 신재경 전 의원이 참 그립고 아쉬웠다. 그녀의 초청행사에는 항상 다양한 한인들이 문전성시였다. 비로서 우리 사는 곳의 주인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알게 모르게 그녀가 한인사회를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운동때 손가락 하나 까딱 않던 사람들이 바쁜 그녀에게 이리 왈, 저리 왈 하며 얼마나 휘둘렀는지. 그녀가 재선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라고 추측한다.

폴 최의 선거구인 버나비 사우스 메트로타운은 원래 앤 캉의 선거구인 버나비 디어레이크의 인구증가로 분리된 곳이다. 중국계 모 버나비 시의원이 공천에 눈독을 들었는데, 소문에는 앤 캉이 적극 폴 최를 추천했고, 경찰 출신에다 법조인으로 서의 능력이 점수를 얻어 그가 낙점이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지역에 보수당 후보로 같은 한국인인 이한씨가 출마했다. 좀 아쉬운 상황이었다. 한인 정치인이 귀한데 하필이면 같은 지역구에서 격돌하다니. 그도 한인사회의 ‘젊은 그들’인데, 꿈을 포기하지 말고 다음에는 다른 지역에서 공천받아 재기를 노리기 바란다.

두 후보의 선거지역은 워낙 신민당 텃밭이라서 폴 최의 당선이 낙관적이었지만, 뜻밖으로 보수당의 약진에 마음 놓고 있을 형편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폴 최를 도와 젊은이들이 선거운동에 적극 나섰다. 집집마다 방문하여 인사하고, 전단지 돌리고, 선거사무실에서 유권자에게 전화하고 하는 일은 생각마다 쉽지 않다. 내가 전 밴쿠버 시장이었던 케네디 스튜어트의 연방하원의원 선거캠프에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가두에서 지나가는 차량에게 손 흔들기, 유권자집 방문하기, 선거사무실에서 지지호소 전화하기 등 한국에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색다른 경험을 해 보았다. 소감은 ‘억만금을 주더라도 다시 선거운동 봉사는 하지 않겠다.’였다. 그만큼 힘들었다. 열에 일고여덟은 선거운동 전화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개인 주택에는 방문 시 황소만 한 개들이 짖어대고, 다 가구거주 아파트에는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한다.

이 모든 어려운 과정을 견뎌낸 폴 최와 선거운동원들. 젊으니까 가능하다. 그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우선 우리가 사는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좀 더 편안하고 쾌적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하겠지만, 말은 안 해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은근슬쩍, 슬그머니 한인사회를 위해 한 손 거들 일도 생길 것이다.

늘푸른 장년회가 청년들이 제안하고 기획한 ‘한인 역사문화 박물관’건립에 대해, 역시 40대의 젊은 한인회장과 모든 한인 주요시설이 들어서는, 일본의 니케이 센터를 능가하는 ‘한인문화센터’를  함께 만들어 가기로 의논한 바 있다. 장년회 뿐 아니라 모든 한인 단체가 힘을 모을 수 있도록 젊은 한인회가 앞장서고 있는데, 폴 최의 주 의원 당선은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BC 주정부의 도움을 이끌어 내리라 기대된다. 연방에는 또한 연아 마틴 상원의원이 있으니 이번이야 말로 문화센터 건립을 실현할 좋은 기회가 온 것 같다.

젊은 그들. 폴 최를 비롯한 모든 한인사회의 젊은 실력자들이 과거의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들의 후손을 위해 장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이제 기성세대들도 응어리진 감정들을 풀고 그들의 꿈에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흉가처럼 변해가는 한인회관을 ‘내 일 아니니까’하고 그냥 방치해야 할 것인가? 아무리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고, 한류가 세상을 휩쓸면 무엇 하나. 30년후면 밴쿠버 이민역사 100년이 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없어도 우리의 손주세대들이 자랑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버젓한 한인문화회관이 세워진다면 우리의 삶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밴쿠버 한인사회는 ‘젊은 그들’로 인하여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할 것이다.

**본 컬럼은 본보의 편집방향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