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8일 수요일
아침 8시20분에 전기가 들어왔다 시동을 준비하는데 10시 10분쯤에 나간 이후로 하루 종일 무소식이다. 점심 후 우리에게 식사를 준비해주는 아주머니에게 고맙다고 몰래 미화 20불을 쥐어 주었다. 저녁때 나를 보더니 아주 고맙다고 남 몰래 눈 인사를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여인은 상업학교를 나와 평양 민경련 사무실에서 경리를 보는데 이번 시운전 기간 현장 시운전 팀 조리 담당으로 차출되었단다. 본부 경리과에서 졸지에 지사 경리도 아니고 취사담당으로 둔갑되기도 하는 상황이다.
야적된 원광석의 혼-배합(Blending), 송-배수관의 위치 및 높이 변경, 급광기 속도 조절, 등 잡다한 작업을 지시해 두었다. 한 낮이 되니 바람은 차갑지만 제법 따스한 햇빛이다. 철조망 너머 먼 논에서 밭갈이하는 사람 4명이 보인다. 한 사람은 감독인 것 같고 중간 한 사람이 삽으로 흙을 파면 양쪽에 있는 두 사람이 삽의 양 옆에 달린 줄을 당긴다. 이렇게 하루 종일 논에서 흙을 뒤집는 작업을 한다. 감독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여기저기를 서성거리면서 가끔 담배를 피운다. 이분은 소위 “지도원”인가 보다. 밤이 되니 유난히 춥다. 아마 영하 5도는 되나 보다. 그런데 전기는 감감 무소식이다. 이렇게 해서 또 하루가 지났다.
3월 29일 목요일
두꺼운 어름을 깨고 정신이 번쩍 나게 찬물로 세수를 하려는데 주방 아주머니가 내 옆을 지나는 척하며 툭친다. 눈짓으로 잠깐 기다리라는 듯했다. 앞뒤 눈치를 보더니 김이나는 물 한 바가지를 얼른 내 앞 얼음물 세숫대야에 던지다시피하며 사라진다. 오랜만에 미지근한 물에 비누칠 세수를 했다. 이것이 몇일전에 건낸 20달러의 뇌물인지 보은인지. 보는 사람도 없는 판에 어름 냉수로 몇 일 고양이 세수를 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제일 힘들었던 일은 화장실 가는 것이다. 40여년이 넘도록 안하던 동작을 마치고 일어나려는 과정은 정말 표현하기가 어렵다.
어느 진화론자들은 직립인간 (Homo Erectus)이 지구상에 나타나기까지 몇 10만년이 걸렸다고 하던데.
하루 종일 전기가 들어오질 않는다. 해주호텔에서 팩스가 왔다고 참사위원에게 연락이 와서 2인이 왕복 140Km를 약 5시간만에 가지러 갔왔다. 참사위원은 정보용 핸드폰이 있나 보다. 투자자인 광진공 본사와의 1회 교신에 24시간이 더 쇼요되는 현장이다.
지시한 여러 작업 중 전기가 없으니 철판, 쇠파이프 등의 절단-용접은 꿈 속이다. 새벽1시쯤에 전기가 와서 가동을 시작했다. 추운 방에서 꼬부리고 자기보다는 공장에 나와 북한의 기능공들과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편한 것 같다. 지친 몸으로 새벽 5시쯤에 들어와 한 3시간 자고 8시경에 다시 현장을 둘러보았다.
여기 저기 용수가 넘치기도 하고 공회전하는 펌프들도 있지만, 전기가 계속 들어온다면 공장은 돌아갈 것 같다. 그래야 보수/보완 상황을 판단할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작업자들은 각자 맡은 위치에서 하라는 일은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급수 발브를 10분에 1분씩 열었다 닫았다” 하라고 하면 공급수가 있던 없던, 1분이 너무 길어 하부가 범람하던 말던 그냥 하라는대로 한다. 그래야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29일이 지나고 30일을 맞이했다.
3월 30일 금요일
오늘 아침에 모든 것을 끝내고 평양으로 간단다. 갑자기 자기네 맘대로 일정을 정하나 생각이 들고 몇일 더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모든 일정은 전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 이외에는, 참사위원이 주관하는 것 같다. 물론 그도 보이지 않는 상부지시를 받겠지만.
이제 마지막 날이다. 나 개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는 서울 태생이지만 우리 집안은 대대로 개성에 본거지를 둔 소위 송악 터주 집안이다. 6.25 동란 한달 전 5월중순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 누런 삼베 상복을 입고 개성인근 중서면 연하리 금사동 선산에 장례를 치른 기억이 난다.
몇일 전 참사위원을 밖으로 불러 부탁을 한 바 있다. 내 선산이 금사동에 있는데 여기 “공화국”까지 왔으니 조상들 묘소에 참배를 허락해준다면 약소하지만 갖고 온 돈을 주겠다고 하면서 내 부친께서 생전에 그려주신 선산 묘소의 약도를 주었다. 고조부모(합장), 증조부모(합장), 조부, 3인의 조모 이렇게 6개의 선산 묘소 그림 복사지를.
조금 전에 나를 보자면서 하는 말이 “박사 선생, 포기하시라요”한다. 이유인즉은 오늘 “피양으로 떠나야디요”다. 군소리 할 수 없이 “알았어요”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만약 묘소가 1~2개라면 급조했을 가능성이 있단다. 묘소가 문제아니라 돈을 뜯는 것이 우선이니까. 캐나다 귀국 후 어느 매체에서 북한 방문자의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자세히 보니 새로 급조된 듯이 풀을 듬성듬성 심은 누런 묘소에 참배하는 모습이었다. 비석도 없고 새로 자른듯한 허연 나무 판대기가 비석인양 묘소 앞에 있었다.
글 김 주영
1966, 인하공대 졸업, 1969, University of Missouri-Rolla, Graduate School, 공학석사, 1970-1972, 한국 KIST 제련연구실 연구원, 1973-2002, Noranda Inc.(현재 Glencore사) Senior Metallurgical Scientist,2003-2017, 대한광물자원공사(광진공), 삼성물산(해외자원사업), 고려아연, Ambatovy사 기술고문. 서울공대, 인하공대, 한양공대, 전남공대, POSCO E&C, 단기강좌(Short Course) 초빙교수
현재 써리 거주
10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나의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북한에 가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일들을 글로 남겨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개칠하듯이 가끔 긁적거렸던 노트를 정리해서 순서대로 몇자 적어본다. 현지에서 그때그때 간단히 일기처럼 메모한 것들 것 모아 보았다. 원래 글 재주가 없는데다가 우리말을 써 본지도 오래돼서 무슨 글인지도 모르겠다. 몇년 전의 사건이고 부분적이지만 북한의 상태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