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24일 WednesdayContact Us

“매 순간이 선물입니다”… 90세 최고령 마라토너의 인생 역주

2026-06-24 08:00:06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 온 뒤 교육자로 성공한 권율(Yul Kwon) 교수가 BMO 하프마라톤에 참가해 완주하고 있다. 올해 90세인 그는 자신의 연령대 참가자 중 유일한 선수로 출전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전쟁의 폐허 딛고 캐나다 교육자로 성공

90세에도 하프마라톤 완주하며 감동 선사

한국전쟁의 상흔 속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소년이 캐나다의 존경받는 교수가 되었고, 이제는 90세의 나이로 마라톤 코스를 달리고 있다.

지난달 열린 BMO 밴쿠버 하프마라톤 대회에서 권율 씨는 3시간 50분 33초의 기록으로 90세 이상 부문 우승을 차지했다. 동시에 그는 해당 부문의 유일한 참가자이기도 했다. 올해 처음 신설된 90세 이상 연령대는 권 씨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지난해까지 대회 최고 연령대는 85~89세 부문이었다. 올해 90세가 된 권 씨는 “90대 선수가 80대 선수들과 경쟁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유쾌한 편지를 주최 측에 보냈고, 주최 측은 이를 받아들여 새로운 연령대를 신설했다.

권 씨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전쟁과 가난,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모두 이겨낸 그는 지금도 달리기를 통해 삶에 대한 감사와 도전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새 조의 신설 소식에 권 씨는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제 인생의 우선순위는 행복입니다.” 그가 말했다. “제 나이가 되면 삶의 끝이 보입니다. 그렇기에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60세에 취미로 시작한 달리기 역시 그 행복의 일환이다. 그는 80세 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산해 자신의 연령대 조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가 거주하는 UBC 인근 ‘시즌스 웨스브룩 빌리지 실버타운’ 로비에서 한 여성이 그의 팔을 붙잡고 이야기를 건넨다. 그녀는 권 씨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은퇴한 경제학 교수인 권 씨는 이곳에서 일종의 ‘스타’다. 그는 최근 이 실버타운의 ‘주목할 만한 주민’ 포상 후보로도 추천됐다.

“달리기는 힘듭니다.” 권 씨가 말했다. 하지만 불편함을 딛고 나아가는 과정은 보상을 남긴다. 그 보상 중 하나가 바로 ‘기쁨’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는 자신이 달릴 수 있는 신체가 있기에 달릴 뿐이다. 뉴발란스 운동화를 단정하게 끈을 묶어 신은 권 씨의 모습은 깔끔했다.

한반도 남쪽 영남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권 씨는 볏짚으로 스스로 신발을 꼬아 신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신발조차 없었다. 가족들이 땀 흘려 수확한 쌀은 일제 강점기 공출로 모두 빼앗겼다. 수돗물도,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던 시절이었고, 권 씨는 굶주림과 기생충으로 인해 올챙이처럼 불룩하게 튀어나온 자신의 배가 부끄러웠다고 회상했다.

권 씨는 9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으나 영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형제가 세 명이었다. “어떻게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다른 형제들은 보내지 못했던 마산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그를 보내기 위해 쌈짓돈을 쥐어짜 냈다. 당시 그의 가장 큰 소망은 그저 “막연하게나마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게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거친 논밭에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터진 한국전쟁은 그의 학업을 중단시켰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행운이 잠시 찾아왔다. 권 씨는 “징집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살던 마을은 몇 달 동안 북한군과 미군 사이의 치열한 포격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가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고 가족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전쟁이 끝났을 때, 아버지는 그를 다시 학교에 보낼 돈이 없었다. 그는 다시 밭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결국 권 씨는 가출을 결심했다. 형수가 꿰매 준 배낭에 교과서 몇 권과 말린 쌀을 가득 채워 넣었다. 마산으로 돌아가는 20km의 길 위에서, 슬픔에 잠긴 소년은 전쟁이 남긴 참혹한 폐허를 목격했다. “남아있는 게 없었습니다. 모든 마을이 불타버린 상태였습니다.”

권 씨는 다시 학업을 시작했다. 생계를 잇기 위해 신문 배달을 했다.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아버지 역시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가진 적은 돈을 쪼개 권 씨를 도왔다. “아버지도 참 힘들게 버티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먼 친척 한 분이 찾아왔다. 권 씨는 “멋진 옷을 입은 그분의 모습이 마치 천사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 친척은 대학교수였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겠다고 말이죠.” 그는 다시 학업에 매진했고 주산의 달인이 되었다. 국가 시험을 치른 권 씨는 전체 3등을 차지하며 직업 훈련 중심의 상업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아버지가 대학교 학비까지 대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권 씨는 집념을 발휘해 결국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막대한 대학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농사짓던 작은 땅 한 뙈기를 팔았다. “정말 잘해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권 씨가 말했다.

졸업 후 그는 서울에 있는 한국은행에 입사했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큰 세상을 갈망했다. 권 씨는 미국 내 54개 대학에 지원서를 넣었고, 놀랍게도 모든 대학으로부터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러나 장학금 지원 제의는 없었다. 그러다 캐나다 싸스카추완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장학금 제도를 알게 되어 이에 선발됐다. 학비 전액 지원 조건이었지만 비행기 표 값은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비행기 표 값이 540달러였습니다.” 권 씨가 말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금액이었죠.”

결국 로타리 클럽의 항공료 지원 도움을 받아 권 씨는 1964년 9월 4일 캐나다 땅을 밟았다. 그야말로 인생의 긴 마라톤이었다. 이후 사스카툰 지역의 따뜻한 두 캐나다인 가정의 도움 덕분에 그의 약혼녀 조 앤 씨도 곧 캐나다로 건너와 합류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맥마스터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호주 퀸즐랜드에 위치한 그리피스 대학교에서 한국학 석좌교수로 18년간 재직하며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쌓은 후 교수직을 은퇴했다.

은퇴 후 권 씨는 SFU 비디 경영대학원의 겸임교수직을 수락했으며, ‘밴쿠버 한인장학재단’과 연계해 ‘권정부 장학금’을 조성했다. “젊은 시절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다른 이들을 돕고 싶습니다.” 권 씨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