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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음악회에 초대합니다

2024-09-04 11:30:43

글 사진_김보배아이

“내일 저녁 슬리퍼 끌고 편안하게 우리 집 음악회 보러올래요?”

이런 내용의 문자를 받을 수 있는 사람 몇 명이나 될까? ‘우리 집 음악회’라니… 이런 초대를 받을 수 있는 인생, 참 멋지지 않은가. 거침없이 음악회의 초대장을 하루 전에 보내어 초대할 수 있는 분, 당신의 집에서 언제든지 작은 음악회를 열 수 있는 분, 그분은 바로 포트무디 청소년 교향악단의 지휘자, 박혜정 선생님이다. 집에서 여는 음악회에 초대받기 위해서는 왠지 나는 예술가여야만 할 것 같고, 그곳에 가면 왠지 예술가들이 주르륵 앉아 있을 것만 같다. 그 예술가들의 대화에 나도 끼어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음악회 초대를 받고 나도 모르게 꿈결 같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었다. 지난 8월 9일 금요일 저녁, 한 여름밤의 턱시도 거리에 한 가정집 정원에서 펼쳐진 작은 음악회에는 어쭙은 예측을 빗나가 바로 턱시도 거리에 사는 이웃들이 삼삼오오 자신이 앉을 의자를 들고 와 뒷마당에 자리했다. 이웃들이 찾아와 함께하는 “정원 음악회”라니… 아닌게 아니라 포트무디는 “예술의 도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자랑하기에 이 저녁 행사는 의미심장했다.

첫 순서는 캐나다에 온 지 열흘 됐다는 꼬마 친구, 헤이즐 리의 바이올린 솔로였다. 이미 영어이름을?? 헤이즐은 체코의 드보르작(A. Dvorak)이 만든 소품 피아노곡 유모레스크 (Humoresque)를 연주했다. “유모레스크”라는 말의 뜻은 원래 재미있는, 유머스러운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이날은 피아노 연주가 아닌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한국에 초등학교 3학년 음악책에 들어 있는 곡이니, 그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이다. 경쾌하기는 하지만 유머러스하기 보다는 우아한 느낌이 있었다. 아무래도 클래식을 많이 들어보지 못한 필자가 느끼는 것이니 아무런 근거가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드보르작이 체코라는 나라의 이름이 만들어지기 전 사람이고, 그 전 이름이 보헤미아(Bohemia)였단다.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을 보헤미안이라고 했다. 지금 보헤미안이라고 하면 자유분방한 유랑민, 이름하여 ‘집시’로 우리는 알고 있듯이 19세기 후기 사회적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창작활동을 했던 예술가와 문학가들이 그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활을 켜는 헤이즐 양의 들썩이는 작은 어깨를 보면서 캐나다 도착한 지 열흘 만에 캐나다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경험을 통해 캐나다 환경에 빨리 적응하라는 박혜정 단장의 바람이 느껴졌다.

두 번째 순서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중 2악장을 아이린 림이 연주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곡에 빠지지 않고 손꼽히는 이 곡은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표현이 모자란다. 아이린은 조용히 등장하여 연주했고, 연주가 끝났을 때 굉장히 수줍게 웃으며 박수를 받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늘을 보니 붉은 노을이 늘어지기 시작한 가운데 하늘로 드높이 팔을 든 나뭇가지들이 한들한들 손 흔드는 것만 같았다. 한숨 고를 틈도 없이 속주 하는 일상 생활에 바람 부는 바깥 풍경 속에 비창을 듣노라니 인생은 참 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세 번째 순서는 플루티스트 모니카의 ‘Fly Me to the Moon’, ‘Can’t help fall in love’를 연주였다. 솜털처럼 가볍고 산뜻한 음색의 악기인 플루트로 감상한 두 곡으로 순식간에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했다.  ‘Fly Me to the Moon’은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가 불러 대히트한 노래다. 이 글을 쓰면서 재미있는 뒷담화가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이 곡의 작곡가는 바트 하워드(Bart Howard)로 20년이 넘는 음악 경력을 쌓은 후에 만들어진 곡이었다고 한다. 대중의 인기를 얻은 명곡들을 듣다보면 작곡가는 어쩌면 그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찾아낼 수 있었을지 궁금해지곤 한다. 작곡가는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며 20년, 아니 수십 년간 셀 수 없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그 숭고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기에 ‘Fly Me to the Moon’이나, ‘Can’t help fall in love’같은 노래는 탄생했다.

이어진 순서는 바이올린과 첼로, 피아노가 어울린 “포트무디 Youth Ensemble”의 차례였다. 김지원 악장의 리드로 바이올린에 염정현과 신민광, 첼로에는 찰스 임, 피아노에 아이린 림이 아리랑 변주곡과 브람스 피아노 퀸텟 op. 34 3악장과 2007년 한국에서 방영 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하얀거탑>의 ost 가운데 ‘B ROSSETTE’ 를 연주하며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파국으로 치닫는 비극과 배신이라는 분위기가 탱고의 선율로 잘 표현된 주제곡이었다. 박혜정 지휘자로부터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최애 곡이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제곡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오늘 앙상블의 <하얀거탑>을 듣고 있자니, 두 음악에는 엉뚱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두 드라마의 주인공 강마에와. 장준혁을 연기한 배우가 둘 다 김명민이라는 것이다. 또 두 곡의 분위기가 빠른 템포라는 점도 같았다. 캐나다의 한인 2세, 3세 청소년들이 주축으로 모여있는 포트무디 청소년교향악단의 역동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한 단골 레파토리를 한번 들어보시길 추천해 드린다. 왜냐하면 반드시 정기연주회에서 연주하기 때문이다.

이어 챨스 임의 첼로 솔로로 다시 한번 고즈넉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영화음악의 대가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로 영화 《미션》의 오보에 연주곡이 원곡이었던 것을 첼로 편곡으로 연주했다. 독주자인 챨스 임은 박혜정 단장이 지난해 메트로 밴쿠버 지역에 처음 유치한 차세대 음악 영재들의 음악 경연대회인 제1회 캐나다 청소년 음악 거장 콘테스트(Canada Virtuoso Young Artists Music Competition) 의 대상 수상자이다. 어린 연주자의 손끝에 닿은 첼로 현이 떨리면서 만들어내는 시공간, 과연 귀에 익은 그 음악은 어느 낯선 장소와 어떤 낯선 시간일지라도 듣는 사람들의 가슴에 쉼표를 그리는 듯했다. 모리코네는 자신의 음악에 가사를 붙이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 당시 시대의 디바였던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이 약 2년간 두 달마다 모리코네에게 편지를 보내서 허락을 얻어냈고, 키아라 페라우(Chiara Ferraù)가 작사하여 성악곡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순서는 시 낭송이었다.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던 나즈막한 목소리의 주인공 지나 정이 촛불 같이 따뜻한 음성으로 한국의 시를 읊었다. 음악은 통역이 필요 없지만 한국어로 된 시는 턱시도 거리의 이웃들에게는 이해 못 할 외계어였을 테다. 첫 번째 시는 랭보의 <감각>이었다. 영어로 낭독하고 한국어 번역으로도 낭송했다. 두 번째는 차영섭 시인의 <하늘의 여름>이었다. 예전엔 몰랐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어스름한 여름 저녁, 산등성이가 보이는 언덕 마을에 한 가정집의 정원에서 노랫소리는 좀 더 울려 퍼졌다. 포트무디 청소년교향악단의 단골 게스트로 자주 협연하는 김용래 테너가 이탈리아 나폴리의 가곡 ‘오 솔레 미오’를 열창했다. 그리고 플루티스트 모니카와 함께 <마중>이라는 가곡을 들려주었다. 필자는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전주부터 아련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노래였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노래의 선율이 맴돌아서 녹화한 영상을 다시 보기 하면서 가사를 찾아보았다. 허림 시인의 시 「마중」에 윤학준 이라는 분이 곡을 붙여 제8회 화천 비목 콩쿠르 창작 가곡 부분에서 1위를 수상한 곡이었다. 노래의 말미 가사에 생경한 표현이 있었다.

이 작은 우리 집 음악회는 포트무디 청소년교향악단의 덤플링 축제의 공연 전 리허설이었다. 연주자에게 한 번이라도 관객앞에서 연주를 하면 실력은 는다. 우리 집 마당에 이웃들을 초대해서 더욱 뜻깊었던 음악회였다. 그랬다. 오늘 밤은 하무뭇하였다.